보리성BORISUNG

불교사상에서의 생명문제와 세계관

보리성2001-11-20 22:16조회 4No. 9
불교사상에서의 생명문제와 세계관 (법륜스님 법문)
 해원선사 발원문 마지막 구절에 "유정들도 무정들도 다 일체존귀할 지이다"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유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생명을 가진 존재를 말한다. 주로 중생이 유정 또는 무정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돌이나 흙과 같은 것을 말한다.  유정들도 무정들도 다 성불한다는 말은 무정도 성불할 수 있다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기로 성불하는 것은 생명체이지만 여기서는 유정만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또 길거리에 서 있는 "돌장승이 성불하는 그때 보자"고 하는 말도 불교에 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생명인 것과 생명아닌 것을 어떻게 규정짓는지 분명 유정이라는 말이 때로는 정신적인 작용을 갖는 존재들 만을 말할 때도 있고 정신이 없는 존재를 합쳐서 생명이라고 말할 때도 있다.   불교의 생명인식  금강경에서도 일체중생시유불성이라 하여 일체중생이 태어나고 생겨나는 방식에 따라 약란생,약태생,약습생,약화생으로 나눈다. 조류처럼 알에서 태어나는 것을 약란생이라 했고 포유동물처럼 태로 태어나는 것은 약태생이라 한다. 그리고 미생물이나 작은 곤충들처럼 고여 있는 물에서 태어나는 것을 습생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모기같은 것인데 요즘 우리들의 개념으로 말하면 알로 태어난다고 하지만 옛날에는 이런 것들이 습한 곳에서 생긴다고 습생이라고 했다.  그리고 화생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지구에서는 그 예를 찾기가 어렵고 지구를 떠나 저 천상계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지구상에서는 아메바와 같은 종류가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새끼가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이 갈라져서 형성되거나 아니면 꺾꽂이를 하는 식으로 암수의 결합이 없이 생성되는 것이다. 원래 화생의 정확한 의미는 내가 자식이 있어야 겠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내 몸의 일부가 자식이 되는 것을 말한다. 복제인간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이렇게만 나눌 수 없다. 생명에는 모양이 있는 것도 있고 모양이 없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들 같이 육체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중생들은 육신을 갖고 있지 않다. 불교에서는 형상과 관련하여 유색(형상이 있는 것)과 무색,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닌 것,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의 4가지로 나뉜다. 그런데 형상이 있는 것과 형상이 없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능한데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닌 것과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은 무슨 말일까?  생물학에서도 동물, 식물로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있지만 동물이라 하기에 곤란한 것도 있다. 동물과 식물의 중간에 형태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럴 때에 동물,식물,동물이 아닌 것으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닌 것,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나눌 수 있다는 의미를 그런식으로 이해하면 조금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 다음에 약무상, 약유상으로 나눌 수 있다. 생명에는 정신이 있는 것도 있고 정신이 없는 것, 그리고 정신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과 정신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렇게 해서 이것을 12류 중생이라고 한다. 일체중생을 세분화시키면 이 12가지 중에 어디에든 포함된다. 이렇게 볼 때 정신이 있고 생각이 있는 존재도 중생이지만 생각이 없는 존재도 중생이라고 해야 한다. 경전에서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성불할 수 있는 존재가 생물학적으로 보이는 생물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존귀한 생명이라는 것을 옛날에는 사람만으로 보았다. 사람 이외의 중요한 존재는 없었고 소나 돌멩이나 풀이나 다 같이 하찮은 미물일 뿐인 것이다. 성경의 계율 중에 살인하지 말라고는 나오지만 살생하지 말라고는 나오지 않는다. 불교의 경전에도 보면 어떤 곳에서는 가끔 살생이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고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만을 생명으로 본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의식은 또 다른 형태로 가까운 역사 속에서도 볼 수 있다. 불과 2백년전 미국에서만도 백인들만이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생명이고 흑인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에서도 원주민들은 하느님이 지으신 생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동물같은 취급을 받았고 당연히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대상에 속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더 좁게 보면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만이 구원의 대상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흙이나 돌멩이 같은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유황불로 지지는 지옥만 있을 뿐이고 흙이나 돌멩이 보다도 가치가 없는 존재로 묘사될 때도 있다. 가장 좁은 범위로 보면'믿는'사람, 더 넓히면 사람 중에서도 백인, 더 나아가 모든 사람, 거기서 더 넓히면 생명(살생하지 말라고 할 때의 범위인 동물까지) 그리고 오늘날 학문에서 식물까지도 포함하여 생명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렇게 생명을 정해도 애매모호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의 경우는 이것을 생물로 보기도 무생물로 보기도 어렵다. 또한 동물이라 하기도 식물이라 하기도 어려운 것이 있다. 동물로 규정된 것 중에도 탄소동화작용을 하는 것이 있고 식물로 규정된 것 중에도 잡아먹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큰 동물을 잡아먹는 식물이 인도나 아프리카 등지에 있다.  음식이 위에 들어가면 녹듯이 식물의 잎사귀가 사람의 손을 갖다대면 오므라드는 신경초라는 풀도 있다. 반면에 멍게 같은 것은 바위에 붙어 있고 건드려도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면 식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주 미세한 것에 까지 들어가 보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동물이고 어디까지가 식물인지 경계가 애매모호한 것이 더욱 많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도 더욱 애매모호하다. 과학적으로 나누기란 대단히 어렵다.  옛날에는 쉽게 나눌 수 있었으나, 최근의 과학적 성과는 그러한 간단한 구분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니까 편의상 사람중심,동물중심,포유류를 중심으로 혹은 식물까지를 포함해서 나눌 뿐이지 그것을 정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는 애매모함이 많은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애매모호함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생물과 무생물을 그리고 동물과 식물을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으며 생명에 대해서 일상으로 우리가 규정을 하지만 정확하게 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는데 왜 불교에서는 돌장승까지도 성불한다고 했으며 무정까지도 성불의 존재로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것-형상이 있는 것과 하물며 형상이 없는 것까지- 이 생명이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경전을 읽을 때나 과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때 어떻게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일체가 다 생명이다' '모든 생명이 하나다''일체가 다 존귀하다'라고 더이상 진척 시킬 말은 없지만 구체성이 없을 뿐아니라 현실적 의미도 갖지 못한다.   불교의 존재인식  불교에서는 존재-생명이라기 보다는-에 대해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주는 그 존재의 양식에 있어서'성주괴공'하고 사람의 육신은 '생로병사'하며 인간의 마음은 '생주이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합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제행무상'한다고 한다.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뜻인데 '무상'을 허무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무지이다.  우주가 성주괴공한다는 말을, 필자는 이 우주를 '물질'이라고 가정하고 설명해 보겠다. 우리들이 쓰는 용어로 표현하면 물질세계는 성주괴공하고 사람의 육신은 신진대사를 하는 생물들 처럼 생로병사하고 사람의 정신은 생주이별한다고 설명을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이해하는 폭이 대단히 넓어서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우주의 아주 작은 한 부분으로 인식한다.  하나의 세계가 있다고 하자. 하나의 세계 가운데에 수미산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고 이 수미산 한 부분에 사람이 살고 있는데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를 연부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아래의 가장 밑바닥에 지옥이 있고 그 위에 아귀의 세계가 있으며 그 위에 사람과 더불어 축생(짐승)이 있다. 그 다음으로 수미산 중턱에 사람 보다 훨씬 살기 좋은 사천왕이 있고 이 꼭대기에 도리천(하늘나라)이 있다. 사왕천에는 천인,천사가 살고 있으며 그 수명은 5백년 이상이나 된다.  도리천엔는 제석천이라는 천주가 있으며 천년 이상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신들의 세계에 대해서 반대하는 아수라의 세계가 있으며 또 그 위로 올라가면 야마천,도솔천,화락천, 자제천이 차례로 있고 이 자제천의 임금이 마왕이다. 그러니까 보통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가 도리천인데 이 마왕은 그보다 훨씬 위에 있는 것이다.  이 마왕이 있는 세계가 욕계이며 이 욕계는 존재자체가 물질로 되어 있다. 여기 있는 존재는 번식을 위해서 반드시 암수가 결합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의 종족은 자기의 생존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흡수해야만 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 배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하늘나라 사람들은 협조관계가 뛰어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식의 가치관과 동일하다. 이것을 욕계라 하는데 하늘나라 사람이라도 기본적인 삶의 방식은 같다.  욕계 위로 올라가면 색계가 있다. 여기에는 욕심이나 욕망이 없다. 정신적으로 아주 고도의 경지에 올라가 있어 일체의 욕망이 없다. 그리고 이 색계 위에는 무색계가 있는데 색계에 비해 무색계는 훨씬 크기 때문에 존재의 생명의 길이가 수 천만년으로 욕계의 생명의 길이에 비해 영원이라고 할 정도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밑에 있는 지옥 세계의 생명기간을 찰나라고 한다. 이 세계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생명의 길이가 아주 짧은 것에서 부터 아주 긴 것에 이르기 까지 많은 존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극히 작은 우주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러한 세계가 천 개가 모여 있는 것을'1소천 세계'라고 하고 천 개의 소천 세계가 모여서'1중천 세계'라고 하며 천 개의 중천세계가 모여서 '1대천 세계'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삼천 대천세계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우주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삼천 대천세계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갠지즈강의 모래알 수 만큼 많다고 한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우주에 비하면 이 사바세계 그 중의 인간계가 살고 있는 지구나 지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극히 미미한 존재인 것이다.   1) 성주괴공  불교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우주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움직이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무상이라는 말은 항상하는 것이 없다 즉 영원함이 없으며 항상 변한다는 말이다. 우주는 성주괴공한다고 할 때 '성(成)'은 갑자기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돌개바람이 일어나듯이 형상이 있는 존재가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그 기간이 1중급으로 우리 연대로 계산하면 수십억년의 긴 세월이 될 것이다. 우주의 빈 공간에서 맑은 하늘에 갑자기 구름 끼듯이 형상이 있는 존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주(駐)'는 머무른다는 뜻으로 그 형상이 머무르는 동안에도 그 형상은 계속 변하지만 일정한 형상을 유지시키면서 변한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손도 세포가 죽고 다시 생기면서 계속 변하지만 일정한 형상을 유지시키면서 변한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손도 세포가 죽고 다시 생기면서 계속 변하는데 그것은 일정한 손의 형상을 유지시키면서 대체된다. 오늘날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우주는 머무르고 있는 상태의 우주이다. 이 머무르고 있는 기간을 1중급이라고 해서 40소급 기간동안 머무르는데 이것을 우리의 연대로 환산하면 수십 수백억년이 될 것이다. 그러다가 이것이 '괴(壞)' 즉 흩어지며 형상이 일그러진다.  하루 아침에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붕괴된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공(空)'으로 구름이 갑자기 사라지고 빈 공간이 남듯이 아무것도 형상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형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엄청난 우주도 이와 같이 생성소멸을 하는데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인 지구의, 인간계의 사람이 영원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인 것이다. 수 억년을 사는 것도 짧은 생명에 비해서는 굉장히 긴 것이지만,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도 금방 태어났다가 죽는 것에 불과 하다.  이것은 우주에 대한 이야기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물질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물질계는 끈임없이 변화하게 되며 일정한 모양으로 나타났다가 모양 없는 것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과학적 세계에서 변화는 몇가지로 나뉘어진다.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로 더 나아가서는 핵변화까지 구분된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기준으로 관찰을 하느냐에 따라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얼음이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키면 형상이 없는 물이 되었다가 다시 수증기가 되고 이것이 다시 물이 되고 얼음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얼음과 물과 수증기의 존재를 각각 별개로 보고 얼음은 얼음으로서의 고유한 존재로만 보고 물은 물로서의 고유한 존재로 수증기는 수증기로서의 고유한 별개로 본다면 마치 3세에서 5세의 어린아이 같이 얼음은 돌멩이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물은 석유나 기름과 비슷한 존재로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각각을 별개로 생각하는 아이는 얼음이 접시에 담겨 있을 때는 돌멩이처럼 생각하다가 밖에서 놀다가 돌아와 봤을 때 녹아서 물이 되어 있다면 기름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여'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겼다'고 할 것이다. 이 아이는 얼음과 물을 별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겠지만 조금만 더 지혜롭게 관찰하는 어른이라면 얼음은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겨난 것도 아니고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얼음은 없어진 것이 아니므로 '불멸(不滅)'이며 물은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불생(不生)'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가르침이다. 얼음이 영원하다. 물이 영원하다는 말이 아니라 존재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생멸관에 빠지는가 하면 존재 하나하나를 별개의 존재로 단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실제 존재는 별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의 의식, 생각,관념이 얼음과 물을 별개라고 인식하고 있음으로 인해 얼음은 없어지고 물은 생겼다는 생멸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의 세계는 생겼다고 하지만 생긴것이 아니고 멸했다고 하지만 멸한 것이 아닌 변화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불생불멸이라고 한다. 우리가 생멸관을 가지게 된 것은 나의 관념이 태어났다,죽었다하는 것을 잘라서 별개로 이해하는 데서 생겨난 견해이지 존재 자체는 태어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물리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얼음이나 물, 수증기의 형상을 가질 때 그 물이라는 근본 알갱이는H2O라는 형상을 가지고 있고 껍데기 형상만 바뀔 뿐 그 근본 형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3개의 변화중 이 형상은 변하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물을 전기분해 하면〔2H2O=2H2+O2〕 로 변하는데 얼음이나 물이 단독적으로 그 근본이 되는 성격이 없는 것 처럼 고유한 물 분자의 알갱이는 없다. 물분자는 수소와 산소의 결합일 뿐이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이 H2O로 되면 우리는 이것을 물이라 하고 H 로만 결합이 되면 수소라 하고 O2 로 결합이 되면 산소라 한다. 이것은 양식에 불과한 것이지 거기에 무슨 고유한 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의 경우에 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수소와 산소로 바뀌었으며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면 다시 물이 생기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것도 우리가 쓰는 언어일 뿐이고 일종의 변화인 것이다. 그러나 변화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산소는 산소로 존재하고 수소는 수소로 존재한다는 것 즉 각 원자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과학에서 밝혀낸 바에 의하면 원자도 변한다. 원자는 더 작은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소립자는 플러스 전기를 띠고 있는 양성자, 마이너스 전기를 띠고 있는 전자,중성을 띠고 있는 중성자,기타 중간자 등, 이러한 것들의 결합으로 소립자는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H2 + H2 = 2He〕으로 결합되면 헬륨이 되고,〔H+H= H2〕으로 결합 되면 수소가 된다.  수소의 원자중에 중수소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은 핵융합을 일으키면 헬륨이 되고 화학변화를 일으키면 수소분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자도 영원히 그 형상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형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원자는 융합되기도 하고 붕괴되기도 한다. 우라늄을 붕괴시켜서 거기서 나오는 질량 감소를 에너지로 바꾼 것이 원자폭탄이고 핵융합하면서 나오는 질량감소가 에너지로 바뀐 것이 수소폭탄이다.  그러면 이 소립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이 소립자의 양성자와 중성자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양성자로부터 마이너스 전기를 띤 파이중간자가 나와버리면 이것이 중성자가 되어 버린다. 양성자와 중성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으로 양성자가 되었다가 중성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소립자는 더 작은 존재인 쿼크로 이루어져 있는데 쿼크가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양성자가 되기도 하고 전자,중성자,중간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물질세계에서도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없으며 물질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 결합하는 방식에 따라 이런 저런 물질이 되는 것이다.  변화에 대해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고정 불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결합에 따라서 잠시 이런 물질 저런 물질의 자기 형상을 유지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주만이 성주괴공하는 것이 아니라 쿼크,소립자,원자,분자,물질세계도 그 '관계성'에 따라서 이런저런 물질로 계속 변한다.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여기서 이 '관계성'과'변화'가 불교사상의 핵심이다.-하는 것이다. 존재는 이러한 관계들로 이루어지며 이 관계 맺은 범위를 공간이라고 하고 이러한 변화를 관찰한 것을 시간개념이라고 본다.  즉 시간 안에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기 때문에 시간관념이 생기는 것이므로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들에게 시간이란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시간은 관념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절대개념으로 보는데 엄밀히 말하면 시간은 절대개념이 아니며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에게 시간이란 개념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다. 산이고 바다고 땅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 바다가 땅이 되기도 하고 땅이 바다가 되기도 하며 바위가 깨져서 돌이 되고 돌이 자갈이 되고 이것이 모래가 되어 흙이 되고 이 흙이 굳어서 바위가 되는 것이다. 얕은 천해에 모래가 퇴적되어 자꾸 쌓이면 나중에 솟아올라 습곡이 형성된다. 알프스의 산맥도 이렇게 해서 생성되었다. 지각이 이동해서 지금의 대륙이 형성된 것 처럼 수많은 변화가 지구속에서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이 공기 중의 허공은 사실 허공이 아니며 물질로 꽉 차있다. 왜냐하면 1 ,1기압 22.4 내에는 6.02 10²³개의 공기분자가 들어있다. 따라서 허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 우주에 가면 1입방미터 안에 수소분자 하나가 들어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허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역시-현재까지의 지구를 45억년으로 보고 태양의 나이는 60억년-이 허공에서 태양이 생기는데 이런 허공에는 수소분자가 하나밖에 없지만 무한히 넓기 때문에 이것이 수축해서 밀도가 높은 물질이 생기는 것이 된다. 이러한 물질의 밀도는 공기에 비하면 엄청난 밀도를 가지고 있지만 우주의 다른 더 큰 밀도에 비하면 이것은 풍선에 불과한 것이다. 앞에서도 서술했지만 원자는 핵이 있고 전자가 그 주위를 돌고 있는데 이 원자의 지름을 보통 1 10-5cm이고 이 핵의 크기는 1 10-13cm이다.  원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핵이 원자 크기의 십만분의 일에 속한다. 그러니까 지구를 원자로 본다면 핵은 농구공만한 크기 정도가 되는 것이다. 태양이 붕괴할 때 겉으로 보기에는 붕괴해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핵끼리 결합하기 때문에 엄청난 밀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블랙홀 정도 되려면 엄청난 밀도를 가지게 되는데 여기서는 공간도 휘어지고 빛도 휘어져서 끌려 들어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 내에는 이러한 고밀도와 허공과 같은 저밀도가 같이 존재하면서 우주 만물의 조건과 상황속에서 성주괴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가 대폭발을 할 때 나왔던 배경복사가 확인되어 대폭발(big bang)이 검증이 되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리해 볼 수 있다. 처음 우주가 허공에서 생성된 점으로 부터 폭발해 엄청난 양의 쿼크가 나왔으며 이 쿼크가 3개 이상 결합한 소립자는 존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사라지는 식으로 쿼크는 물질세계에서 가장 작은 근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쿼크-소립자-원자-분자-물질로 이루어지며, 이 물질 중에서도 무기질에서 유기질로 변해 가는 것도 있다. 무기질은 결합구조가 비교적 간단하고,유기질로 갈수록 결합구조가 훨씬 복잡해지는데,포도당만 하더라도 C나 H나 O 같이 간단한 구조가 C6H12O6로 복잡한 결합을 하고 있다. 녹말의 경우는 이러한 포도당의 구조가 첩첩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무기질에서 유기질로 넘어 갈수록 그 구조가 복잡해지 듯이 이렇게 결합의 양식이 복잡해지고 넓어지는 구조로 물질세계 자체가 변해 왔다.   2) 생노병사  그런데 우리가 생물학에서는 보통 단세포부터 생명이라고 부르는데 이 생명이 지구상에 나타난 시기를 길게 잡아서 35억년으로 본다. 지구가 출현하고 10억년이 걸렸다는 이야기인데 이 10억년이라는 기간은 엄청난 기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출현한 것은 원숭이 비슷한 때(유인원)부터라 해도 최대 한도로 3백만년이다. 우리 인간의 조상은 10만년 밖에 되지 않는데 이 10억년이라는 것은 엄청난 기간인 것이다. 그 긴 세월동안에 지구상에서는 어떤 실험이 이루어졌을까? 다른 혹성으로부터 생물이 이식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 지구상에서 생명이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처음에 생명이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서 실험하고 준비해서 제출된 지금까지의 학설이 있다. 다음의 예를 들어보자.  자동차의 부속은 약2만개 정도라고 한다. 그 중에 부속이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겠지만 이 부속품을 모두 바구니에 담아두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에다 휘발유를 붓는다고 자동차가 되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2만개의 부속품을 바구니에 담아둘 때와 설계도에 의해 조립했을 때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똑같은 물질이라도 그것이 무질서하게 있을 때와 그것이 질서 정연하게 나열될 때는 작용이 다르다.  물질이 소립자로 있을 때와 이 소립자가 일정한 양식을 가지고 결합하여 원자로 될 때는 다른 것이다. 원자로 있는 것과 원자가 결합된 분자로 되었을 때에도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숨 쉬는 공기중의 산소는 분자인 O₂의 형태이다. 자동차도 아주 엄밀하고 고도화되면 자동화 성향을 가질 수 있다. 자동차공장의 부속품은 자동차 보다 많다. 설계도도 마찬가지로 그냥 수동으로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 보다는 자동으로 만드는 공장이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런데 문제는 자동차 공장에서 자동차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공장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을 자동으로 만드는 그런 공장이 있다고 가정하자. 요즘 공장 만드는 공장이 많이 있다. 앞으로 더욱더 발달해서 자기와 똑같은 것을 만드는 공장이 생긴다고 가정해 보면 자동차가 자동차를 만들고 자동차 공장이 자동차 공장을 만드는 시스템이 생겨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약 A라는 공장이 A라는 자동차 하나를 만들기 전에 고장이 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하나를 만들고 나서 고장이 난다면 하나의 공장은 남게 된다. 이것이 하나 이상, 약2개를 만들고 고장난다면 그 수명의 제곱에 비례하면서 계속 늘어갈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이 가능하려면 생명의 특징인 복제라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 자기가 죽기 전에 똑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가 죽기 전에 자기와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자동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세포의 수준이다. 이 정도의 자동설비가 이루어 지려면 공장의 크기가 엄청나게 크겠지만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 그 크기가 점점 작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단세포 하나 속에 이러한 자동시스템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이런 자동시스템을 가질 수 있을까? 천년, 이천년이라는 시간도 사실 지구역사에 비해 짧은 시간이다. 이 지구상에서는 그 정도 실험을 통해서 지금까지 도달하는 데 10억년이 걸렸다. 쿼크에서 소립자-원자-분자-물질로 되는데도 수십 억년이 걸렸다. 이미 이루어진 세계에서 볼 때는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태초에 그것이 형성되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단세포의 이런 자동화가 만들어졌다가 실패하기를 계속해 왔으며 결국 이것이 발전하여 이 공장에 쓰는 부속도 자신이 만들어내기 위해 스스로 땅으로부터 생산해야 한다. 이런 공장이 여기저기에 생기게 되면 죽은 공장-기능은 멈춰져 있으나 부속은 사용이 가능한 공장-으로 부터의 채취도 가능하게 되고 조금씩 변화해 나가면서 변이가 일어날 때 이 변이가 생존에 유리하면 더욱더 발전적으로 나갈 것이고 불리하면 소멸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생존은 반드시 유리한 쪽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같이 일어나게 되어 불리한 것이 99개가 일어나고 유리한 것이 하나만 일어난다고 해도 계속 반복되어 가는 과정에서 유리한 것이 살아남기 때문에 실험이 계속되었을 경우 유리한 쪽으로 변이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서로 다른 여러 단세포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작은 시작을 의미한다.  최소한 10억년의 우주적 실험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을 인간이 수천 년이 걸려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인간은 위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결합의 정도가 무기질에서 유기질로, 세포로 이관 되는데 여기에는 물질은 같지만 각각의 유전자가 있음으로써 그 결합방식이 달라지고 그냥 바구니에 자동차부속이 담겨져 있을 때와 설계도에 의해 조립된 자동차하고는 서로 다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또 이 공장들이 서로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연대교류를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의 독특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자동공장이 서로 분업을 한다.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이 하나의 덩어리는 뗄 수 없는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다세포이다. 우리몸에는 세포 하나 하나마다 몸 전체의 설계도가 들어있다. 그러나 이 세포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다시 결합해서 적정 분화되어 전체중에서 자기기능만을 한다.  전체기능을 다 할 수 있지만 자기의 기능만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몸이 가지고 있는 각 기능의 역할이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세포로 발전하게 되고 그 관계가 더욱더 복잡하게 되어, 하나의 자동시스템이 자동시스템끼리 결합을 하여 더욱 더 복잡한 전체로서의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이 각각의 자동시스템이 따로 떨어져 나오면 살 수가 없게 변해 왔다. 그러니까 오늘날 단세포인 아메바에서부터 우리 인간에 이르기까지 변해 왔다고 하지만 생물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전의 기본골격은 똑같은데 단지 좀 더 복잡하게 진화해왔다는 것 뿐이다.  물이 분해되면 수소와 산소로 존재하지만 결합의 설계가 해체되면 그 형상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설계도 자체가 유지되면 아무리 부속을 갈아 끼운다 해도 그 형상은 유지되는 것이다. 자동차의 경우 그 부속을 아무리 갈아 끼우고, 모두를 교체한다 해도 자동차의 기능과 모양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모든 세포는 6개월만 지나면 전부 바뀐다. 지금의 육신이'나'라고 한다면 6개월 후에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몸을 유지하는 것은 살이 아니고 유전자라는 설계도이다. 이 설계도가 해체되는 것이 생로병사이다. 이 존재는 설계도에 의해서 태어나서'생'이 되고 이것이 계속되어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부속을 교체하면서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데 이것이 '로병'이다. 그러다가 해체되어'사'로서 삶을 마치게 되는데 이 수명이라는 것은 설계도에 이미 정해져 있다. 그 설계도 안에 교체의 시기를 알려주는 것이다. 육신은 반드시 '생로병사'하는 것이다. 수명이 짧은 것도 있고 긴 것도 있지만 이것은 우리 인간의 시간개념이고 생로병사하는 것은 분명하다.   3) 생주이멸  여기서 이들의 차이를 이렇게 볼 수 있다. 물질의 세계는 물질의 원리, 파악한 과학적 지식으로 예측이 가능하다. 세포라는 것에서는 우주적인 관점에서 굉장히 큰 변화로 보이지만 현재 우리들의 생각에서 볼 때 단세포까지는 그렇게 큰 물질적 변화로 보지 않고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가는 데는 굉장한 질적인 변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예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여기에 책상이 하나 있고 그 밑에 토끼 한 마리가 있다. 그리고 책상위는 풀이 있다. 그러면 물질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중력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토끼가 풀을 향해서 뛰어오를 때 이것이 왜 뛰어 올라갔는지는 토끼몸 속에 있는 물리 화학적 변화를 아무리 연구하고 분석을 해도 알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연구할 때 그것의 물질에 대한 구조는 연구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토끼를 해부해서 물리,화학,핵 변화로 아무리 검증을 해도 이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토끼는 명백하게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것은 다른 차원의 작용인 것이다.  다세포인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바로 정신현상이다. 처음에 물질현상에서 생명현상으로, 그것이 다시 정신현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하나의 현상에 하나의 작용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축적구조를 갖추면서 점차 그 자체로서 완결된 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의 출발은 바로 학습이었다. 모든 생명현상은 그 출발에서부터 각인된 유전인자로 결정되며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우리들의 몸은 유전인자로 한번에 결정된다.  그렇다면 학습이란 무엇일까? 예를 들어 새가 난다든지 뱀이 긴다든지 하는 것은 유전인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만 유전인자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공백이 있는 이영역이 학습에 의해 채워지는 영역이다. 극미생물로 가면 학습 보다 유전인자에 의한 본능의 영역이 많은 반면 점점 진화될수록 유전의 영역 보다 학습의 영역이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몸의 항체도 일종의 학습적 성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한번 경험하고 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대응하는 성향을 가진다는 것이 학습성이다. 학습의 출발은 이런 것이다.  오리의 경우에 항상 제 어미의 꽁무니만 따라 다니는데 이것을 알에서 깨어나서 맨 처음 본 것이 어미라고 보는 유전적 본능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에 고무풍선을 맨 처음 보여주면 계속 풍선만 따라 다닌다고 한다. 이것을 각인이라고 하며 반복적인 학습이 아니라 단 한번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인간의 거의 모든 행위가 학습에 의해서 결정되며 학습력이 정신세계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학습이 바로 정보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을 가는 것도 습관이며 우리가 웃는 모습도 학습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학습에 의한 것이다. 학습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면 인간이 돼지우리에서 크면 돼지의 흉내를 내게 되고, 개 집에서 자라면 개의 흉내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학습능력은 뛰어나다. 개를 사람한테서 키워도 개는 유전인자에 의해서 거의 결정되기 때문에 사람의 흉내를 내지 못한다. 창조성의 출발은 흉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하고 제일 가까운 동물이 원숭이인데 흉내를 잘내게 되는 정보가 일정 수준 이하가 되면 흉내가 되고 정보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이 정보의 지적변화가 일어나서 창조성이 생기게 된다. 인간도 일본사람들 처럼 처음엔 흉내만 내다가 정보가 일정수준이 넘어서서는 창조성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받는 학습은 어느 정도일까? 사람의 유전자적 정보는 단 한번에 의해서 오직 어머니와 아버지 두분으로부터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유전인자가 다를 확률이 매우 많지만 사실 우리들의 피는 대단히 많이 섞여 있다. 우리가 받는 학습은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그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렇게 올라 간다면 아마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수직적으로 연관되어 영향(정보)를 주고 받게 될 것이다. 그뿐아니라 동시대에 한평생을 살면서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고 받는다. 이것이 오늘의 나를 만든 학습인 것이다.  한 세대에 단 한번에 의해서 오직 두사람에 의한 것도 이렇게 섞인다. 학습이라는 것은 수십 수백 사람으로부터 정보를 받는 것이다. 이 학습으로 만들어진 자신을 잘 분석하면 인류사 전체에 대한 정보가 여기에 들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학습을 받지 못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일 뿐이지 인류로서의 인간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정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흑인이나 우리나 별 차이가 없으며 민족으로서의 차이는 아주 부차적인 것이다. 이러한 수직적인 정보의 결합과 수평적인 정보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정신현상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인류로서의 인간에 대한 정보는 만 3세 때까지 다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3세 후에 인간을 여우의 소굴에 갔다 놓아도 여우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우 처럼 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만 3세 때까지 여우굴에 있다가 데리고 오면 개나 여우가 사람의 흉내를 내듯이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죽는다고 한다. 이것은 두뇌의 기본 컴퓨터 메모리 안에 이미 여우에 대한 정보가 채워져 벼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현상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오직 어머니나 아버지 한 사람만 보고 자라도 그는 인류의 무슨 정보를 다 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모든 정보가 있기 때문인 인류로서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전자가 다르고 정보가 다르기 때문에 개개인의 차이는 있게 되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볼 때 인생에 있어서 3세 때까지는 나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므로 전생에 속한다. 옛날 사람들이 며느리를 고를 때 그 부모를 보고 고른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거의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처럼 개방된 사회일수록 3세 이후에 들어오는 정보가 많기 때문에 옛날 보다 정확성은 떨어진다. 사회에서 사람이 크는 것의 별 차이가 없지만 자신의 아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최소한 3세까지는 어머니가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사람이 되고 아프리카 사람이 되고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은 이 기간의 정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피부색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이민 2세들도 미국 사람하고는 다르다. 왜냐하면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 자라기 때문에 서로 통일성이 있고 섞이지 않기 때문에 독자성이 있다.  그러면 이 섞인 부분의 공통점이란 무엇인가? 거기에는 2가지가 있다. 유용성과 공리성이다. 첫째로 유용성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정신세계도 유용한 정보가 널리 퍼지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은 정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은 인류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둘째로는 공리성인데 정보는 전체가 이로운 쪽으로 진행되어 축적되어 왔는데 이것을 인류의 양심이라고 불러 보도록 하자. 구석기 시대와 같이 공개된 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 집단이 살아 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선 유용하고 유익한 정보만이 살아남아서 양심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것이 형성되었다.  지금의 인류는 과도기에 있다. 그러니까 신석기 시대의 이기심은 그 집단의 존립에 유용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유지되었지만 이 전체가 공개되어 모든 정보가 우리들에게 똑같이 공유가 된다면 개인의 이기심은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정보는 머지않아 곧 공개될 것이고 그리하여 오늘날 통신정보의 발달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이런 차원에서 인간이 본래의 본성으로 돌아갈 유리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내부에는 이기심이라는 힘이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거대한 통신 정보 시스템을 통제할 수가 있다. 물론 반대로 소수만이 독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마음이라는 것은 '생주이멸'한다는 것이다. 금방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 아니지만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생각은 찰나에 바뀐다고 한다. 우리들의 생각,마음이라는 것은 정말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다. 거짓말 없는 속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해도 이것은 금새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일체의 생명관과 자연의 원리  문제는 이런 원리-우주가 성주괴공하고 육신이 생로병사하고 마음이 생주이멸한다-를 알면 모든 것이 허무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존재라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해 연관되어 변화하는 것이 특성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소립자에서 물질에 이르기까지 연관되어 있어도 생명현상의 연관에 비해 정신현상의 연관은 훨씬 더 복잡하며 복잡하기 때문에 특수현상이 일어나고 이 특수현상은 오늘날 처음으로 물질세계의 유전인자를 바꿀려고 시도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나'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우주의 생성소멸속에 '나'라는 존재도 같이 숨쉬면서 움직이고 있다. 물질세계로 보면 이 모든 움직임의 한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생명현상은 똑같이 물질로 되어 있지만 결합의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용을 하듯이 생명현상에서 인간 종자의 이 정신 현상은 또 완전히 다르다. 인간에 대한 물질적인, 생물현상적인 측면만의 연구는 굉장히 위험하지만 또한 정신적인 측면만의 연구도 엄청나게 위험하다. 예를 들면 개나 돼지는 자기가 배부르면 먹을 것이 옆에 있어도 보지 않지만 인간의 경우는 배가 고파서 굶기도 하고 배가 부르지만 또 먹기도 하고 그것을 창고에 쌓아두기도 하는데 이런 현상은 물질적이고 생명적인 현상의 연구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물질진화를 통제할 정신진화를 요구하는 생태계 문제  인간이라는 것은 이런 모든 현상이 집합된 총체적 존재이다. 이런 전체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나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는 채소를 먹고 물을 먹는 등 물질을 먹고 자라게 되지만 물질이 오염이 되면 나는 병이 들게 되고 아무리 정신현상이 어떻고 해도 먹지 않으면 죽게 되는 하나의 생물인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것은 물질의 결합과 정보의 결합에 의해 내가 구성되어 있는 것 처럼 모든 결합의 하나하나가 모두 생명인 것이다. 바로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인 것이다.  한 부분만이 나라고 여기는 데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 생기고 사람과 동물의 착취와 살육이 발생하며 또한 우리 생존의 토대인 대지와 대립하게 된다. 자연의 모든 생물이 나의 구성요소이며 저 많은 사람들이 나의 존재의 토대인 것이다. 우리 몸의 팔과 손이 그것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기능을 하려면 전체 몸이 있어야 하듯이 총체적으로 보면 비로소 나이기 위해서는 각각의 팔과 다리가 모여져 나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생명관이며 일체의 생명관이다.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연관된 속에서의 생명이며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을 적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삶이 될 수 없으며 반드시 괴로움이 생기며 고통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왜곡된 정신현상이 불러들인 결과들인 것이다. 이 무지를 깨우치게 되면 인간은 다른 동물을 살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인간이 자연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실제 자신을 스스로 붕괴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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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성의 집 · borisung.com · 2001년 원본의 메뉴·게시판·사진을 그대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