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자세와 낮은 자세
먼저, '비굴한 정신을 던져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건 도저히 안 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불성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대한 모욕입니다.
마음을 느긋하게 가집시다.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나는 이 우주와 한 몸이다'라고 하는 것을 항상 스스로 되새깁시다. 큰소리로 외친다면 더욱 좋습니다. 어느 일정한 시간에 그것을 일심으로 되풀이하고, 그 밖의 모든 일을 생각치 않고 있으면, 그것이 결국 삼매에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생깁니다. 그 자신감은 점점 성장하여 큰 자신감이 됩니다.
이렇게 길러진 자신감은 결코 증상만(增上慢)이 아닙니다. 증상만이라는 것은, 깨닫지도 못했는데도 깨달았다고 '생각하는'것입니다. 인간의 헤아리는 작은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는 그 깨달았다는 것을 스스로는 알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은 훨씬 윗단계(이른바'해탈지견(解脫知見)'에 오른 사람)로서, 대개의 경우, 어느 새인가 깨닫는 것이 보통입니다.
웬지 모르게 마음이 밝아졌다. 느긋하게 되었다. 크고 넓어진것도 같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에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무엇이든 내가 마음먹은대로 되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스스로는 알지 못해도 '웬지 모르게 그런 마음이 되었다'고 하는 때에 첫 단계의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 '나는 이 우주와 한몸이다' 라고 마음에 염원하는 가운데, 웬지 그런 마음이 되어 가는 것은 절대로 증상만이 아닌 것입니다.
가르침을 들을 때나 남에게 가르침을 전할 때는,될 수 있는 한 낮은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음의 자세도, 겉으로 드러낸 자세도, 겸손한 태도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진리를 생각할 때는 아무리 높은 자세를 취해도 좋습니다.
"나는 부처님의 아들이다. 따라서 우주의 상속자이다. 아니 우주 그 자체가 곧 나다. 따라서 우주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당치도 않은 것을 마음으로 생각해도 조금도 지장이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품으로 곧 용해되어 가는 지름길이며, 그렇게 용해되어 가는 것이 부처님의 본 마음인 것입니다.
둘째로,《법화경》에 대한 '신'과 '해'두 가지를 확실히 몸에 유지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없어서는, 확실하게 부처님께로 용해되어 가지 못합니다. 자칫하면, 옆길로 빠지거나 막다른 골목에서 방황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새롭게《법화경》을 고쳐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출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법화경》에는 모든 상태의 인간에게 알맞는 가르침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읽어가는 동안에 어느 곳에서인가 문뜩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곳이 막다른 길의 출구입니다.
세째로, 다행히《법화경》을 만나서 그것을 잘 '이해'하고 '믿는'사람은 곧 바로 부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지만, 오탁의 악세인 현대에 있어서는 세상은 '궁자'로 충만해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이러한 '궁자'를 구제하지 않는다면,《법화경》의 정신을 몸으로 실행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궁자'를 구제해 인도하는 데는, 역시 이 '신해품'에서 보여 주신 방편의 정신을 잘 이해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방편을 흉내라도 내어 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든 그 흉내가 진짜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네번째는, '신'과'해'에 이르기 위한 매우 좋은 방법이 이 품 자체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네 명의 성문들은, 세존의 '비유품'의 설법을 듣고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였으나, 단지 이해했다고 마음으로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다른 비유로 세존께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가르침을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 들일'뿐이 아니라, 깨달아 얻은 바를 능동적으로 '발표'해보는 것은, 스스로의 '해'를 깊게 하는 것이며 '신'을 높이는 대단히 훌륭한 방법인 것이지요.
그 뿐만 아니라, 타인의 '해'를 깊게 하며 '신'을 높여 주는 공덕까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체험을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중요성이, 이품의 언외(言外:말에 나타난 뜻 이외)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