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 선사와 떡장수 할머니
-석명정(釋明正)스님-
흐르는 시간은 흡사 전광석화와도 같아서 벌써 소망에 찬 새해 새봄이 돌아왔다. 입춘절 봄맞이에 알맞는 서산대사의 시로 송구영신해 보자.
곳곳에 꽃이 피어 자욱한데
얼마나 많은 붉은 꽃잎 앞시내에 쌓였나.
황산곡시에 취해 머리를 돌리니
팔만 산봉우리에 달이 지려누나.
처처개화원근미(處處開花遠近迷)
기다홍우낙전계(幾多紅雨落前溪)
황정독파일회수(黃庭讀罷一回首)
팔만봉두월욕저(八萬峰頭月欲低)
성당(盛唐)시대에 금릉 땅에서 떡장사를 하는 유(兪)씨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낭야 각 스님에게 법문을 들으러 다녔는데, 낭야는 할머니에게 임제의 무위 진인(無位眞人 : 모습없는 참사람)화두를 일러주었다.
이 할머니는 장터에서 떡을 팔면서도 단순하게 이 모습없는 참사람만을 오로지 골몰하게 찾았다. 한 곳으로 한 곳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구월심으로 찾았다. 막신일호(莫神一好)의 경지, 정말 하나에 미쳐 버려 깊이깊이 매몰되어 갔다.
이 한 곳으로 한 곳으로 빠져들어간다는 말은 참선의 모든 것이다. 야보(冶父)의 글에도 그러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때엔가 달이 하도 좋아서
창주를 지나는 것도 몰랐네.
유시인호월(有時因好月)
불각과창주(不覺過滄洲)
이렇듯 한 곳에 미친다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하루는 어떤 풍각쟁이가 연화(蓮花)라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했다.
"만약 유의(柳毅)의 편지를 전하러 가는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동정호(洞庭湖)에 올 수가 있었을까."
그 할머니는 이 소리를 듣고 그만 활연히 무위진인 화두를 깨닫고는 너무 감격해서 떡 함지박을 땅에 집어던졌더니 할아버지가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네가 미쳤나?"
그러자 할머니가 한번 주먹으로 치면서 이르기를,
"임자가 알 수 있는 경지가 아니오."
하고는 그 길로 낭야한테 달려갔다. 노파의 눈빛을 읽은 낭야는 그가 이른 경지를 간파하고 이렇게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인고?"
노파가 답했다.
한 무위진인이 있는데
팔은 여섯, 머리는 셋, 힘껏 성도 내네.
보배가 빛나는 산 갈림길에
억만 년토록 흐르는 물이 봄이 온 줄 모르더라.
유일무위진인(有一無位眞人)
육비삼두노력진(六비三頭努力嗔)
일벽화산분양로(一壁華山分兩路)
만년유수부지춘(萬年流水不知春)
할머니는 낭야에게 칭찬과 함께 그자리에서 인가(印可)를 받았다.
떡장수 할머니 얘기는 또 있다.
선문(禪門)에서는 임제(臨濟)와 덕산(德山)을 영웅으로 칭한다. 덕산은 본시 강사(講師)였다.서촉 땅에서『금강경』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교중(敎中)에 이르기를, "금강이란 정(定)을 말함이니 후득지(後得智)가운데 천 겁(千劫)을 부처님 위의(威儀)를 배우고,만 겁을 부처님의 세밀한 행동을 배운 뒤에야 성불(成佛)한다고 했거늘 저 남방의 마구니들은 이 마음이 곧 부처라 한다." 하고는 분발해서『금강경소초(金剛經疏초)를 짊어지고"행각(行脚)해서 남방으로 가 이 마구니들을 쳐 부수겠다." 다짐하고 길을 떠났다.
덕산이 처음 도착한 곳은 풍주인데 그는 길에서 떡을 파는 노파를 보고는『금강경소초』를 내려놓고 점심으로 요기할 떡을 팔라고 하였다.그러자 노파가 묻기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무엇이오?"
"『금강경소초』입니다."
"그래요. 내가 한 가지 묻겠는데 만약 제대로 답을 하면 떡을 보시하여 점심 요기를 시키겠으나 만약 답을 못한다면 다른 데 가서 사 자시오."
"그럼 물으시오."
"금강경에 이르기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상좌는 점심을 한다니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하려 하는고?"
덕산은 경학은 밝은지 모르지만 선에 관해서는 아직 생짜배기라 답을 못하자 노파가 용담(龍潭)에게 가라고 지시하였다.
이와 같은 점심 법문(点心法門)은 최근에도 있었다.『고승법어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있다.
혜월(慧月)스님 회상(會上)에서 주금강(周金剛,덕산 스님의 성이 주씨임)의"삼세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는데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하려는가(三世心도 불가득인데 點應何心)."의 법문을 만공(滿空)스님 회상(會上)으로 물어왔다.
그 당시 만공 스님께서는 법을 보월(寶月)스님께 전하고 조실(祖室)에서 퇴실한 뒤였다. 학자들 가운데 아무도 답을 하지 않았음을 아시고는 큰스님께서 답을 안 보낼 수가 없었다.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하느냐에 대한 답이다.
"과거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 점심을 먹어 마쳤느니라."하시고는 종이에 써서 보내려고 하였다.
그때 보월 스님이 그 답을 보시고는"큰스님, 죄송합니다."하시며 성냥불로 태워 버리고는 그냥 나가버렸다.
만공 스님은 그 자리에 좌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일 주일 간 대용맹정진을 하였다. 그리고는 7일 만에 큰 소리로 일성을 터뜨렸다.
"내가 보월 자네한테 10년 양식을 받았네."
보월 스님이 점심법문답을 하였다.
"호서를 등지고 영남으로 향함은 마음 가운데 남은 의심을 끊지 못하여서인데, 지금도 남은 의심을 끊지 못하였구나. 보고 난 뒤에 태워 버리고 다시 남은 의심을 끊어 버려라."
배호서(背湖西)하고 향영남(向嶺南)은 심중(心中)에 부절여의(不絶餘疑)더니 여금(如今)에도 부절 여의(不絶餘疑)로구나. 견후(見後)에 소각(燒却)하고 경절 여의(更絶餘疑)하라.
만공 스님은 이 답을 보고"참으로 밝은 답이로다."하며 극구 칭찬하였다 한다.
다시 덕산과 떡장수 할머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덕산이 용담 화상의 처소에 이르러 큰 소리를 쳤다.
"'용담'을 들어온 지 오래 되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못도 보이지 않고 용도 또한 나타나지 않는구나."
이 때에 용담 화상이 병풍 뒤에서 나타나며 말했다.
"네가 친히 용담에 이르렀구나."
덕산이 예배하고 밤이 이슥하도록 모시고 법문을 듣다가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밖이 칠흙같이 어두워서 불을 켜니 용담이 확 불어 꺼버렸다. 바로 그때 덕산은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 선문에'임제 할', '덕산 방'의 가풍(家風)이 시작되려는 순간인 것이다.
선방(禪房)은 선불장(璇佛場)이라고도 하는데'부처를 단련하여 뽑아내는 곳'이라는 말이다. 야보(冶父)라는 큰스님이 있다. 곧 부처를 야금(冶金)하듯이 다루어내는 대장장이라는 말이다.
보검을 만드는데 쇠를 풀무에 달구어서 두드리고 두드려서 쇠의 잡똥이 다 빠져야 시퍼런 보검이 되듯이, 우리의 이 못난 타성도 잡철이 다 빠지도록 수련을 쌓아야겠다. 덕산과 야보 같은 거장이 없는 쓸쓸한 한지(寒地), 그래도 선과 차가 있으니 다행이다.
술은 지기를 만나야 마시고
시는 멋이 통해야 서로 읊조리네.
그래도 뭔가 허전하니
차나 한 순배 마시세.
주봉지기음(酒逢知己飮)
시향회인음(詩向會人吟)
유흠일착제(猶欠一着在)
호끽일완다(好喫一椀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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