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성BORISUNG

생활 속의 발견

보리성2002-02-14 13:12조회 15No. 14
생활 속의 발견 -석명정(釋明正)스님-
봄을 찾으러 이산 저산 헤매어도 헛탕치고 집에 돌아와 후원 매화 가지 휘어잡아 향기 맡으니 봄은 벌써 가지마다 무르 익었네.
  이 시는 옛날 어느 비구니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다. 행복 또는 진리를 멀리 밖이나 남에게서 찾지 말라는 말이다.   옛날 선승들에게 가르침을 물으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일상 생활에서의 말을 인용하여 들려 준다.   "차 마시게." "떡 먹어라." "밥 먹어라."또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거나, 발을 구르거나, 멱살을 잡아 한바탕 메어치거나 한다. 이것이 모두 자기에게 있는 황금 보물을 찾아서 진리의 광명 속에 수용하라고 가르쳐 주는 큰 자비의 말씀인 것이다.   감히 말하노니, 모든 어진 교훈들은 값싼 인정의 잔소리이고, 다만 이렇게 분명하게 자기의 진면목을 단적으로 확실하게 규명시켜 주는 어른들이야말로 고마운 분들임을 알아야겠다. 우리 생명의 원천과 본질, 그것의 규명 없이 어떻게 이 고달픈 윤회의 고통과 갈증을 풀겠는가.   운수납자들이 수행을 하다가 큰스님께 의문이 나서 물어 보면 말이 길지 않다.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이것이 참선의 제일 요긴한 관문이다. 이 관문을 지나야 한 곳을 뚫으면 천 곳, 만 곳을 한꺼번에 뚫으며, 한 낌새를 밝히면 온갖 것을 한꺼번에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선방에서는 선승들이 젊음과 한평생을 바쳐 밤잠을 아껴가면서 이것에 골몰하는 것이다."이 도리가 무엇인가?"를 참구하면서.   생활의 발견은 곧 자아의 발견이다. 진리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진리는 상식적이고 정말 쉬운 거로구나!'라고 생각될지 모르나, 일상적인 것 자체가 진리라고 착안하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일상 생활을 잘 착안하면 참으로 푸른 하늘을 활보하고 완전한 인격을 갖추게 된다. 옷 입고 밥 먹고 세수하고 누구를 만나 차 마시고 집에 가서 발 닦고 잠 자고 이렇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 그 밖에 우리에게 또 무엇이 있겠는가.   여기에 한 가지 모자라는 것이 있다면,그 일상 생활 가운데 주체가 되는 주인공 즉 자성(自性)자리를 우리는 모른다. 아니 그 알맹이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어릿광대 같은 삐에로가 되어 그저 한평생 탈춤이나 추며 돌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지 모르겠다.   임제(臨濟)는 이 영원히 미가해(未可解)한 주제를 극명하게 설명하여 놓았다.   "이 빨간 몸덩어리 위에 한 차별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이 있어서 항상 여러분의 눈. 코. 입 등을 통해 출입한다. 아직 똑똑히 보지 못한 사람은 보아라.보아라!"   "우리 몸뚱이와 온 허공,우주의 모든 것이 전부가 아니고 다만 눈앞에 역력히 외로히 밝은 그것이 너의 자성이다."   삼소굴 경봉 노사는 생전 일상 생활 중에 누가 친견하러 오면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하고 묻는다.그러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다가 돌아가려하면   "대문 밖을 나서면 거기는 돌도 많고 물도 많으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도 말고 물에 미끄러져 옷도 버리지 말고 잘들 가거라." 하고는 껄껄 웃으시니, 친견하러 온 이들도 그냥 따라 웃는다.   조선시대 말엽 거목(巨木) 경허(鏡虛)이후 자신의 목소리로 사자후를 토하며 설법도생(說法度生) 하시던 노사의 일면이다. 돌부리에 걸리고 물에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것쯤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곳에 바로 노사의 평생 공부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많은 것도 필요 없고, 큰 것도 필요 없고, 깊이 아는 것도 뛰어난 지혜도 필요 없는 것이다. 요는 꿈을 깼는가, 실날 같은 성색(聲色)의 그물에서 벗어났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경봉 노사의 법문은 일상 생활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시자(侍者)로 곁에 모시고 있을 때 참으로 우스운 일들이 더러 있었다.   젊은 부부가 오면 신랑이 각시보다 좀 못하면 신랑보고 "각시를 하루에 몇 번씩 업어 주노?" 한다.   그런데 아무 대답이 없으면   "각시 복에 잘 사는줄 알아라. 하루에도 몇 번씩 업어 주거라."   또 나이가 좀 들은 부부가 오면 이렇게 말한다.   "아이가 몇이노?"   "머슴애만 셋입니다."   "어이구, 삼만석꾼이구나. 아이를 셋이나 낳았으면 세 번이나 죽었다 살아났네. 그래 영감이 패물을 해주드냐?"   "아니오."   "영감한테 금반지를 해 달라고 해라. 부처님도 여자는 주기(珠璣: 보석)를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가장되는 이도 여자가 좋아하는 것을 좀 해 주고 부려먹어야지. 그렇다고 또 집안 형편이 그렇게 안 되는데 자꾸 해 달라고 조르지도 말고."   부부에 관한 가훈이 더 이어진다.   "유도할 때는 지는 것부터 배운다.서로 의사가 맞지 않을 때라도 서로 양보해야지 이기려는 데서 큰 소리가 난다. 서로 지고 양보했다고 해서 부부는 일심동체인데 자존심 상할 일이 있나, 밖에 나가서 체면에 손상될 일이 있나, 그러니 서로 위하면서 잘 살라고."   시자 때는 큰스님이 무슨 저런 세속적인 말씀만 하실까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도에도 눈이 밝으시고 또 세상살이에도 환 하시니까 불법을 생활화해서 하시는 말씀이었슴을 알게 되었다.   서툰 법문은 그저 어렵기만 하고 고담 준론은 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돌부리에 걸려 자빠지지 말고 물에 미끄러져 넘어지지 말라."는 말씀은 사람의 정신을 격동시켜 생생하게 산 정신을 불러 일깨워주는 말이다.   선문(禪門)에 각하조고(脚下照顧)라는 말이 있다. 송대(宋代) 오조 법연(五祖法演)의 제자로 오조의 삼불(三佛)이 있었다.   불과 극근(佛果克勤), 불감 혜근(佛鑑慧勤), 불안 청원(佛眼淸遠)의 삼불을 '오조 밑에 삼 불'이라고 하는데, 어느 날 밤 불을 끄고 밤늦게까지 좌선을 하고 있는데 세 제자에게 오조가 요즈음의 소식을 말해 보라 했다.   혜근이 말했다.   "채봉(彩鳳)이 단소(丹宵)에서 춤을 춥니다."   청원은 이렇게 말했다.   "철사(鐵蛇)가 고로(古路)를 옆지릅니다."   극근은 일렀다.   "각하조고(脚下照顧: 발 밑을 보시오)."  그러자 법연은 "나의 종(宗)을 멸(滅)하는 것은 극근 뿐이다."하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발 밑을 보시오! 발 밑을 보시오! 여러분들의 발 밑이 또 한세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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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성의 집 · borisung.com · 2001년 원본의 메뉴·게시판·사진을 그대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