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자 때 어른 스님(경봉 노스님)을 모시는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니 일구(一句)에 관한 이야기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어느 선원에서 '영산회상의 꽃을 들어보인 도리'와 '조주의 앞이빨에 털이 난 것' 그리고 '서산의 고기에 뿔이 난 도리'를 물어 왔다.
경봉 노사의 답
몇 군데나 이렇게 물었나.
일구 도리를 해결하지 못했구나.
고인들이 씹던 지게미를 탐하지 말라.
보검으로는 송장을 베지 않는다. 미소
기처여시문(幾處如是問)
미소일구자(未消一句子)
막탐고조강(莫貪古粗糠)
보검불참시(寶劍不斬屍) 신
한 가지 이치로 넉넉하게 통하는 도리를 고인들의 씹던 지게미를 가지고 번거로이 묻는 것은 허물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언젠가는 어느 선원에서 조실 스님이 당신의 선사(先師) 스님 법어집을 보내 왔는데, 노사가 보고 난 뒤 이렇게 답했다.
"선사 스님의 법어에 일구 법문이 빠진 것이 유감."
그러자 즉각 대답이 왔다.
"석가 ㆍ달마 이후로 몇 사람이나 일구 법문이 누락되지 않았습니까. 잘 일러 보내 주십시오."
그 뒤에도 몇 차례의 문답이 오고갔는데, 다음과 같이 답을 보내고 마쳤다.
"끝내 자기 법사의 일구 법문을 분명히 이르지 못했다. 코가 석자로다.쯧!"
요즈음 아이들 농담에도 이런 말이 있다.
"얘야, 어디 아~해 봐라. 속이 시커멓구나."
또 선문에도 개구견담(開口見膽)이라 했다. '입을 열면 속이 보인다'는 뜻이다.
선사들의 그 찬란한 경지를 농축한 것이 선게(禪偈)인데 이것은 장문이거나 서술식일 수가 없다. 길거나 설명을 붙이면 이미 긴장감과 폭발력은 사라지고 향기와 분위기는 반감된다.
마음 속에 반게만 지녀도 오만 인연 사라진다.
심지반게만연공(心持半偈萬緣空)
일구나 일 게도 오히려 많고 길어서 반으로 줄여 놓았다.
분골쇄신해도 오히려 갚을 수 없음이여.
일구가 요연히 빛나 백억 가지를 초월하네.
분골쇄신미족수(粉骨碎身未足酬)
일구요연초백억(一句了然超百億)
일구의 곡조 서늘하여 천고에 고르니
아득한 푸른 하늘에 달이 돋누나.
일구곡한천고조(一句曲寒千古調)
만중청벽월래초(萬重靑碧月來初)
일구에 밝게 삼라만상을 꾸리니
중양절 삼월에 국화가 향기롭네
일구명명해만상(一句明明該萬像)
중양삼월국화향(重陽三月菊花香)
선문에서 일구의 매력을 빼면 별 볼일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경봉 노사 생전에 오대산 한암 노사의 선문은 숫제 일구니 반게니 하는 그것 마저도 생략된 적이 있었다. 백지를 보내 온 것이다.
이 백지 법문에 노사의 답은,
"ㆍㆍㆍ"
이렇게 점을 세 개 그려 놓고 허허 하였다.
가뭄이라 곡식이 없다 하지 마소.
사월 남풍에 보리가 누렇게 익었네.억!
한천막도무전각(旱天莫道無田穀)
사월남풍대맥황(四月南風大麥黃)
이왕 선문답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말 또한 소개해 보련다.
"욕득친절(欲得親切)인댄 막장문래문(莫將問來問)하라."
만일 공부의 친절처를 얻고자 한다면 물을 말을 미리 준비해서 묻지 말라는 말이다. 즉 이말 하면 이렇게 대답하고 저말 하면 또 어떻게 대답한다는 궁리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실제로 자기가 수행을 해서 어떤 경지를 얻으면 구태여 말을 궁리해가며 선문답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도리는 말이나 글로써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설사 그렇게 알았다 하더라도 한 푼어치도 필요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간월도(看月島)를 두고 지은 원효의 게송이다.
십년 동안 어느 곳에 깃들었느뇨.
백제나라 건너 섬일세.
애오라지 지혜의 달빛으로
강산의 푸르름 찬연히 비추네.
십재서하지(十載捿何地)
백제피안도(百濟彼岸島)
요장혜월색(요將慧月色)
조파강산벽(照破江山碧)
보조(普照)의 게송도 좋다.
솔잎 한 걸망과 한 병의 물로 만족한 살림살이
이런저런 인연에 끄달리지 않고 이 곳에 지내네.
우습다. 옛사람들 불조를 구워삶는다는 이야기
소리 듣고 빛을 보는데 거리낄 게 무어냐.
일양소엽일병수(一襄松葉一甁水)
부동제연와차방(不動諸緣臥此方)
가소석인팽불조(可笑昔人烹佛祖)
문성견색유하방(聞聲見色有何妨)
천태 덕소(天台德韶)의 오도송을 음미해 보자.
통현봉 마루는
인간의 경지가 아닐세.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어
푸른산이 눈에 차누나.
통현봉정(通玄峰頂)
불시인간(不是人間)
심외무법(心外無法)
만목청산(滿目靑山)
위의 글들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나귀가 우물을 들여다 볼 때 나귀가 우물을 들여다 본다고 할 수도 있고, 우물이 나귀를 본다고 할 수도 있다. 주관과 객관이 바뀔 수도 있고 혼연일체가 될 수도 있다.
'조파강산벽(照破江山碧)'이니, '만목청산(滿目靑山)'이니 하는 구절은 우물이 나귀를 보는 경지에서 봐야 할 것이다. 창틈으로 스며 들어오는 햇살로 태양 전체를 음미하듯이.
낙화는 생각이 있어 유수를 따라가는데
유수는 무정하게도 낙화를 떠나 보낸다.
낙화유의수류수(落花有意隨流水)
유수무정송낙화(流水無情送落花)
모든 사물에 의미와 색채를 부여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보조(普照)의 게송은 노고추(老古錐)의 칭호를 듣는 조주(趙州)의 게송인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아슬아슬하게 팽불팽조(烹佛烹祖)하는 고위(孤危)의 말을 쓸 게 뭐 있나, 소리를 듣고 빛을 보는 것으로 얼마든지 할 말을 다 할텐데.
일구(一句) 이야기는 서양에도 있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들 즉 랭보니 말라르메니 하는 시인들은 일구시어(一句詩語)를 추구하느라고 7년을 방황하기도 하고, 한 줄의 글을 쓰려고 책상 위에 백지를 대한 채로 밤새도록 공포에 떨며 하얗게 지새우기도 하였다. 한다. 그래서 "한 송이 꽃에서 우주를 본다."라는 등의 선게도 나왔나 보다.
공자의'오도일이관지(吾道一而貫之)'또는 '군자불기(君子不器)' 순자의 '막신일호(莫神一好)' 노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등 평생 허리에 차고 다닐 만한 일구 금언들이 너무 많다.
일구 혹은 반게라고 작은 것으로 착각하면 큰일이다. 일구에 통하면 천구,만구를 일시에 꿰뚫으니 말이다. 제방선원에서는 방촌(方寸,마음)에 이 일구의 의정(疑情)을 품은 채 천 번 만 번 씨름을 하며 매닥질치는 둔한 공을 들이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쇠를 다루는 대장간이요, 거대한 숫돌이요, 선불장(選佛場)인 것이다.
안다고 하는 지지일자(知之一字)와 심의식(心意識)을 가차없이 녹여내는 용광로인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는 촉루식이 다 녹아 버리고 텅 빈 고목에 바람이 불면 윙하고 용이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 경지에 도달하면, 일구의 깃발을 통현봉(通玄峰)에 높이 꽂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