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무아(諸法無我)
다음으로 '제법무아'라는 것은,'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반드시 다른것과 연관되어 있으며, 전적으로 다른것과 동떨어져 고립되어 있는 것(즉, 아(我))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벌레나 공중을 날으는 새도, 산속의 소나무들도, 몇 십억년 전에 지구가 생겼을 때에는 모두 똑같이 진흙과 같이 녹아 있던 불덩어리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모두가 하나의 생명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흙도, 돌도, 구름도, 공기도 모두 그러합니다.
시야를 그러한 먼 옛날로부터 돌려 현재 우리들이 살고있는 모습을 보아도, 잘 생각해 보면 땅에도 의존해 살고 있으며, 돌에도 의존해 살고 있습니다. 벌레의 도움을 받는가 하면, 새에게도 신세를 지며 살고 있습니다. 구름이 없으면 비는 내리지 않습니다. 공기가 없다면 한 시간도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표면상으로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 것도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드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생물인 인간의 신체와, 돌이나 철과 같은 광물은 전혀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우리들의 신체 대부분은 물이라고 하는 광물이며, 또한 소금이라던가, 칼슘, 철, 동과 같은 광물의 영양분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음을 보아도 대략 이해가 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생활이 되면, 그 관계는 더욱더 깊고 강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깊숙한 원시림에서 40년간이나 흑인을 상대로 의료사업과 전도를 해 온 노벨 평화상 수상자 알베르트 슈바이쳐 박사는 20세기 최대의 위인 중 한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슈바이쳐 박사는 장년 시절의 어느 날, 바하의 어느 곡을 듣고 있었을 때 갑자기 강하게 마음에 번뜩이는 것이 있어서, 그 순간에 '아프리카 오지(奧地)의 흑인을 구하자'고 굳게 결심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볼 때, 우리들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연의 모습에 깊은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백년도 전에 죽은 독일의 작곡가 바하는, 자기자신과 아프리카 흑인과의 관계등에 대하여서는 꿈 속에서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심혼을 기울여 만든 아름다운 음악은,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르샤스의 젊은 학도 슈바이쳐에게 세기적인 큰 결심을 하게된 기연(機緣)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으로서,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이처럼 깊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물의 망과 같이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똑같은 나라의 사람들 사이라면, 그 그물의 망이 얼마나 밀접한가는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경제행위 상에서 보더라도, 자신이 내고 있는 세금이 누구를 위해서 쓰여지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표면상에 나타나 있는 관계만으로도 그 그물의 복잡함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곳에 있어서의 관계는 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그 바탕을 살펴보면, 하나의 생명에 일관되어 살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은 자아(아집)에 얽매여, 제각기 자기본위의 사고방식, 자신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하는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대립이 일어나 싸움이 생기고, 서로 빼앗고 서로 죽이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제법무아'의 의미를 깨닫는 것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한발 한발 위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역사적인 필연이며 인간이 걸어 가야 할 자연스런 길이기 때문에, 어느한 곳에 멈추어 있거나 그 곳에서 물러선다는 것은 '죄'이며 '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라든가 '악'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 지금 말한것 처럼,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당연한 걸음을 멈추는 것, 혹은 뒤로 물러서는 것을 '죄'라고 하거나 '악'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인간의 당연한 발걸음을 멈추게 하려는 반대의 에네르기(힘), 즉 '미혹'을 버리는 순간, '악'은 어느 샌가 사라져 버리고, 부처님의 빛만이 찬란히 빛나는 광명의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한발 한발 위를 향하여 부처님께 가까이 가지 않으려는 것은 인간이 가야 할 길에 역행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죄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상태도 자기본위의 '아집'의 사고 방식으로 본다면, '나의 좋지 못한 보답은 나 자신이 받는 것이니 상관없지 않은가, 남에게 이것저것 간섭 받을 필요는 없는 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그릇된 생각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어디선가 서로 연관되어 살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악'은 반드시 어디선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한 사람의 '나태'는 반드시 전체의 진보를 방해하게 됩니다.
그 점을 알게 되면, '내 자신이 아래로 타락하거나, 어느 한 곳에서 느긋하게 멈춰 있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다. 위를 향해 조금씩이라도 올라가자'고 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제법무아'의 진정한 정신입니다. 불교의 정신이 노력주의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