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바라밀(六波羅蜜)
다음으로 '육바라밀'이라는 것은, 보살의 수행을 하는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여섯가지의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서 곧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여섯 가지입니다.
보살이라는 존재는, 성문이나 연각과는 다르게, 자신만이 미혹에서 벗어나면 충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구제하는 것이 그 일이기 때문에, '육바라밀'은 모든 타인을 구하는 것이 전제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첫번째는 '보시(布施)'입니다만, 이것에는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와 '신시(身施)'가 있습니다. '재시'란 금전이나 물질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며, '법시'란 사람들에게 사물에 대해서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고, '신시'란 자신의 아픔을 무릅쓰고 남의 걱정이나 근심을 덜어 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의 한 가지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예를들면, 힘겹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러한 마음만 있다면, 자신보다도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혹은 공적인 일을 위해서,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희사(喜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령, 도저히 그러한 일을 할 수 없는 경우의 사람이라도,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라도 타인이나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지식이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돈이 아니더라도, 몸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남에게 일을 가르치거나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뛰어나지 못하더라도 '법시'는 가능한 것으로 자신의 바른 체험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법시'가 됩니다.
혹은, 맛있는 반찬의 요리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할지라도, 또 뜨게질하는 방법 하나를 일러주었다 할지라도 역시 '법시'인 것입니다.
이 중에 어떤 것이든 좋은 일이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보시'를 실행하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세 가지를 모두 다 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는 일이겠지만, 여하튼 '보시'라고 하는 것이 보살행의 첫째 조건으로 되어 있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번째의 '지계(持戒)',이것은 '부처님으로부터 받은 계율에 의해서 자신의 마음의 미혹을 없애고, 올바른 생활을 영위하여 자기 자신을 완성해 나가지 않으면 진정으로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점은, 자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기에, 도저히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이 올바른 생활에 틀어박혀 있어서는 오히려 '자기완성'이라는 것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애쓴다'는 것도 '지계'의 큰 요점으로서, 사람들을 위해 애씀으로 인해 그만큼 자신도 향상되고, 자신이 향상하는 것에 따라서 그만큼 사람들에게도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끝없이 순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인욕(忍辱)', 이것은 현대의 인간에게는 특히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석존께서는 모든 덕을 갖추고 있는 분이고, 수행에 의해서 부처님이 되신 분이시기에 하나의 덕만을 들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송구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인간 석가모니의 최대의 덕은 실로 '관용(寬容)'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석가모니의 어떤 전기를 읽어 보아도, 어떤 경전을 읽어보더라도, 석가모니께서 화를 내셨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씌어있지 않습니다. 전후의 상황으로 봐서, 이 때에는 화를 내셨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경우에서조차 추호도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박해를 받아도, 혹은 제자들이 배반을 하고 떠나버렸어도 원망하기는 커녕, '아! 불쌍하구나'라고 동정과 자애(慈愛)의 마음을 일으키셨습니다.
만일, 현실적인 일에 억매인 사람으로부터, 단지 인간으로서의 부처님이라는 분의 성격을 한 마디로 설명해 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철저한 관용을 지닌 분'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어떤 일에 있어서 화를 내거나 사람을 원망하거나 게다가 분노와 원한을 상대방에게 품으려고 하는 것 만큼 부처님을 슬프게 하는 행위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 만큼은 서로서로가 자제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욕'이라는 것은 곧 '관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점차 수행을 쌓아가면, 천지의 모든 것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들은, 자주 비가 오면 답답하다 불평하고, 날씨가 계속 화창하면 이번에는 먼지가 일어난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수행을 쌓고 마음에 실로 여유를 가지게 되면, 비가 오면 '아! 비가 오니 좋다'라고 감사하게 되고, 날씨가 화창하면 '태양의 빛은 참으로 좋구나'라고 찬미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주변의 변화에 마음이 걸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에게 손해나 모욕을 주거나 자신을 배신하려는 상대에 대하여서도, 그저 증오와 원한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 역으로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더라도, 기뻐 날뛰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 하는 일이 잘 된다고 해서 우월감을 일으키는 일 없이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도 바로 '인욕행'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경지까지는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무리한 일을 요구해 오는 사람에게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여기는 정도까지는 의외로 쉽게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경지까지는 이르고 싶다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인욕'이라는 정신적인 습관이 어느 정도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갖추어진다면, 그만큼 이 세계의 평화는 보존될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인류는 눈에 띨 정도로 행복해 질것입니다.
넷째로, '정진(精進)'입니다만, 이 '정(精)'이라는 말은 '불순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열심히 배우고 수행하더라도, 머리속이나 행동속에 불순물이 있어서는 정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잡다하고 보잘것 없는 것은 내던져 버리고, 중요한 목표를 향해서 오직 일편단심으로 나가는 것이야말로 정진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일심으로 정진하더라도, 도저히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거나, 혹은 그 수행에 대하여 외부로부터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 것과 같은 일이 생기거나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일은 넓은 바다의 표면에 이는 잔물결 같은 존재로서, 마침내 바람이 그치면 사라져 버릴 환영(幻影)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자고 일단 마음을 굳혔다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전력을 다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정진'인 것입니다.
다섯째는 '선정(禪定)'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조용한 마음' '움직임이 없는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이라는 것은, 마음이 안정되어 동요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단지 열심히 '정진'하는 것만이 아니라, 조용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차분히 관망하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물의 진정한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올바른 방법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물에 대한 올바른 시각,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여섯번째의 '지혜(智慧)'입니다. 말의 의미에 대하여서는 앞에서 자세히 설명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이 '지혜'가 없다면 사람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예를들면, 길바닥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누워 있는 병자와 같은 소년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 소년을 보고, 아! 불쌍하구나라고 생각하여 앞뒤 생각도 않고 돈을 주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소년이 만일 가벼운 마약중독 환자였다고 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그 소년은 웬 행운이냐 하고 그 돈으로 마약을 구입해서 계속 주사를 맞겠지요. 그 때문에 점점 더 회복하기 힘든 중병환자가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만일, 이 환자에게 돈을 베푸는 대신에, 적당한 보호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면, 의사를 만나 갱생의 길을 갔을지 모릅니다. '보시'하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 잘못되면 엉뚱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지만, 세상에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크고 작게 무수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들이 사람을 위해 도움이 된다거나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훌륭한 행동을 하는 데에도 진정한 '지혜'를 가지지 못하면 모처럼의 자비심도 유용한 작용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행에 있어서 '지혜'는 절대로 빼놓을 수가 없는 조건인 것입니다.
한편, 문수사리는 말을 계속합니다.
'이렇게 일월등명여래께서는, 성문과 연각을 희망하는 자에게는 그것에 알맞는 가르침을 보이시고, 여러 보살들에게도 그것에 맞는 가르침을 설하시어, 마침내 더할 나위없는 깨달음과 지혜를 성취시켜 주셨습니다. 그 부처님이 입멸하셨는가 싶더니, 다음에 또 다시 일월등명여래라고 하는 부처님이 나오셔서 똑같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이렇게, 2만여명의 일월등명여래께서 잇달아 나오셨습니다.
그 마지막의 일월등명여래는, 출가하기 전에는 어떤 한 나라의 왕이었고 8명의 왕자가 있었으나, 왕자들은 아버지가 출가하여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많은 부처님 처소에서 선행을 쌓았습니다.
그 마지막의 일월등명불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대승무량의경(大乘無量義經)》을 설하고, 그것이 보살도의 가르침이라는 것과, 부처님은 언제나 그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도록 염원하시며 지켜주고 계신다는 것을 설하셨고, 설법을 끝낸 후에는, 대중속에 조용히 앉아 삼매에 드셨습니다.
그 때, 하늘에는 아름다운 꽃비가 내리고 대지가 진동하는가 싶더니, 일월등명불의 미간의 백호상에서 찬란한 빛이 퍼져나와 지금 바로 우리들이 본 것과 같이 동방 일만팔천의 세계를 비추었습니다.
미륵이여, 그 때, 그 모임에는 많은 보살들이 법을 들으려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 불가사의한 빛을 보고, 모두가 그 까닭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묘광(竗光)이라는 보살이 있었습니다. 일월등명불께서는 이윽고 삼매로부터 일어나시어, 묘광보살(妙光菩薩)을 향하여 "묘법연화"라고 하는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60만년이라는 오랜세월 동안, 조용히 앉은 채로 가르침을 설하셨으며, 듣는 사람들 역시 그와같이 가만히 앉은채로, 몸도 마음도 동요됨이 없이 가르침을 듣고 있었습니다만, 그 60만년이라는 세월이 식사를 한 번하는 시간과 같이 짧게 느껴졌습니다.'
똑같은 이름으로 똑같은 일을 하는 여래가 2만명이나 계속해서 나오셨는데, 여래라는 것은 '진여(眞如)로부터 온 사람'이란 의미이기 때문에, 절대자, 즉 부처님이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 부처님이 2만명이나 똑같은 일을 하시고, 같은 형태로 출현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 마지막의 부처님이《묘법연화경》이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설법은 60만년이나 계속 되었는데, 실로 짧은 시간처럼 느껴졌다---는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는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나중에 '여래수량품 제16'에서 분명해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자세한 설명은 필요치 않으나, 한마디로 말하면, 진정한 깨달음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이고, 또 장소(공간)도 초월한 것으로서 언제 어디에서라도 진리라는 것을 강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수사리의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됩니다.
'그 설법이 끝나자, 일월등명불께서는 모두에게 "저는 오늘밤 안으로 여러분들과 헤어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그날 밤에 입멸하셨지만, 그후에는 묘광보살이 "묘법연화"의 가르침을 가지고 계속해서 설하였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바꾸어서, 이 묘광보살에게는, 구명(求名)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명예와 이익에 마음이 얽매어져 있어, 경전을 읽어도 진정한 의미는 잘 알지 못하였으며, 잘 잊어버리기에 구명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으나, 이 사람은 자신의 결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을 참회하며 조금씩 선행을 쌓았기 때문에, 많은 부처님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감사하고 존경하며 찬양하는 마음을 일으켰기에 마침내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면, 실은 미륵보살이며, 그는 당신의 전세(前世)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묘광보살이라는 것은 실은 나였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삼매에 드신 세존의 이마에서 빛이 나와 동방 일만팔천의 세계를 비추는 불가사의한 일을 보아도, 아주 오래 전의 세상과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저는 예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석존께서는, 반드시 지금부터 "묘법연화"의 가르침을 설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합장하고 일심으로 기다려 주십시요. 부처님께서는 지금 정법(正法)의 비를 한 없이 내리시어, 도를 구하는 자를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문수보살은 이렇게 말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다시 계송으로 똑 같은 의미의 내용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으로써 이 품은 끝이 납니다만, 여기서 깊이 가슴을 울리는 것은---부처님을 이러한 문장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다름아닌 부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정신력이 기반된 것입니다.
마침내 입멸할 때가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되신 석존께서는, 후세의 인류를 위해80년의 생애에서 얻은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유언으로 남기고자 마음 속으로 결정하신 것이, 여기서 최후의 일월등명불의 모습을 빌어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지만, 전기(傳記)에 의하면, 석존의 육체는 병과 노령으로 인해 대단히 쇠약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광대하고 의미 깊은 설법을 시작하셨고 더욱이, 그것이 실로 힘차고 밝으며, 적극적이고 진실한 가르침《법화경》이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의 깊이와 함께 정신력의 위대함에 정말로 머리가 숙여 집니다. 또한 그 정신력은, 후에 남은 중생을 생각하시는 대자비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