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거화택(三車火宅)
어떤 나라의 한 마을에 아주 큰 부호(장자(長者))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정도 나이가 들었지만, 굉장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전답과 집과 하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집은 매우 크고 호화로웠지만, 문은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그 집에 가면, 토담은 무너져 있고, 벽은 허물어져 있으며, 기둥은 토대가 썩어 있었고, 대들보와 마룻대는 뒤틀어져 있어 지금이라도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집에 어느날 돌연 불이 났습니다. 불은 한쪽에서부터 순식간에 번져갔습니다. 그런데, 집안에는 장자가 아끼고 아끼는 자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자는 집 밖에 있었는데, 불이 난 것을 알고 황급히 돌아와서 보니, 아이들은 그것에 아랑곳없이 정신없이 놀며 떠들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에 타버릴 지경인데도, 그것을 알아 차리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열기가 몸을 태울 정도로 다가오는 데도 집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노는 것에 너무나도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자는 그것을 보고 순간 생각했습니다. 나는 힘이 있으니, 아이들을 상자나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단숨에 밖으로 끌어 내 올까? 하지만, 가만 있자, 여기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고 더욱이 좁은 문이다. 아이들은 지금 그 문으로 빠져 나오지 않으면 큰일이라는 것 조차 모르고 있다. 노는것에 너무 집착하여 정신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떨어져서 불에 타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불이 무서운 것이라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일지도 모른다. '이 집은 불에타고 있으니 빨리 밖으로 나가라'라고 일깨워 주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장자는 아이들이 가엾다는 일념에서 있는 말을 다해 타일러 보았지만, 아이들은 그 말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을 뿐아니라,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이곳 저곳에 뛰어다니며 놀기만 하는 것입니다. 가끔씩 아버지의 얼굴을 흘끗흘끗 보곤 하지만,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신다'라는 정도로 전혀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집은 큰 불에 타고 있다. 빨리 아이들을 구해내지 않으면 불에 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오라고 아무리 이야기 해도 나오지 않으니, 방편으로써 구할 수밖에 도리가 없구나. 그렇다, 아이들은 전부터 장난감을 아주 좋아했다. 장난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마음이 끌릴 것이다.
이에, 아버지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가 문 밖에 있다.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줄테니 빨리 나와서 가져라. 그리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지금 얻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자 빨리 나와서, 그것을 가지고 놀지 않겠느냐?"
그러자 아이들은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에 대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각기 마음이 급해져 서로 밀치고 앞을 다투어 불타고 있는 집으로부터 무사히 빠져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장자는, 아이들이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네거리의 광장에 모여 앉아서 즐거운듯 있는 모양을 보고, 겨우 안심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저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양의 수레와 사슴의 수레와 소의 수레를 주세요"라고 보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장자는, 양과 사슴과 소의 수레보다 훨씬 더 크고 훌륭한 대백우차(大白牛車)라는 수레를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비유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이미 대략 이해하셨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설명드린다면, 아버지 장자는 물론 부처님입니다. 썩어가는 집이라는 것은 사바세계와 인간의 마음의 위험하고 비참한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물론 이 비참한 미혹의 외부에 계시지만, 언제라도 그 안에 있는 아이들(중생)에 대한 일을 잊으시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의미 깊은 부분입니다.
이 사바의 세계가 참으로 위험한 상태라고 하는 것은, 허물어져 가는 집의 묘사로 여실히 보여지고 있으며, 인간의 마음의 비참함은 그 다음 게문(偈文)의 처음 부분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여러가지 기괴한 새들과 짐승과 나쁜 벌레들이 돌아 다니며, 대소변의 냄새가 가득하며, 더러움이 흐르고, 그 위에 여우와 이리등이 서로 물어 뜯으며 시체를 게걸 스럽게 먹으며, 먹이를 다투며 뛰어 다니고 있는가 하면, 구반차귀(鳩槃茶鬼)라는 귀신이 개를 괴롭히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의 모습은 정말로 말세의 인간세계를 그대로 축소한 것이며,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이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서 불이 났습니다. 화재라는 것은 인생의 온갖 괴로움, 늙음, 병,죽음등과 같은 것입니다. 육체의 즐거움과 물질적인 만족만에 정신이 없는 인간은, 그러한 괴로움이 언젠가는 닥쳐 온다는 것을, 아니 이미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불속에서 중생을 데리고 나오려 하지만, 문은 단지 하나밖에 없고, 그것도 좁으 문이기에 그곳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즉, 구제받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게다가 쉽게 지나갈 수 없는 '좁은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바꿔 말하면, 진리는 오직 하나이고, 미적지근한 기분으로는 도저히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다음으로, 부처님께서는 아이들을 책상이나 상자 위에 올려 놓고 한번에 밖으로 끌어 내시려고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첫번째 해석으로서, 타력(他力)으로 구제하려고 생각하셨던 것이라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타력으로 밀어내려 해도 중생은 육체와 물질의 즐거움에 온 정신이 쏠려있기 때문에, 그 구원의 손길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본인이 깨닫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신력(神力)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발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중생을 단숨에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인도하려 해도 너무나도 육체와 물질의 즐거움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도중에 낙오되어 버릴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 세상의 추악함과 무서움을 안다'고 하는 가장 초보적인 단계로부터 인도하시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 쓰심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가끔씩 아버지의 얼굴(부처님의 가르침)을 흘끗흘끗 보기만 할 뿐, 그 가르침이 자신의 인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진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자주 경험하는 일이며, 실로 범부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마침내 최후의 수단으로서, 양의 수레(성문승), 사슴의 수레(연각승), 소의 수레(보살승)를 보이십니다. 그러자 비로소 중생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각자의 성격에 맞는 가르침을 골라 보아라,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말씀하심에, 가지고 싶은 것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뛰어 나갑니다.
'마음에 그리던'이라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성문의 경지에, 혹은 연각의 경지에, 혹은 보살의 경지에 들어 갔다라는 것을 의미함니다. 또 '뛰어 나왔다'라는 것은, 이미 어느정도 노력하였다, 어느정도 수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나란히 마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불이 난 비참한 집에서 일단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들은 아직 자신들이 구제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목적의 수레(성문의 깨달음, 연각의 깨달음,보살의 깨달음)를 실제로 얻으려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향하여 졸라댄다고 하는 것은, 즉 그 희망에 대하여 일심을 집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생각지도 않게 그러한 단계를 훨씬 넘어선 곳에 최고의 가르침인 실대승(實大乘:일불승-대백우차)의 깨달음이 찬연히 빛나고 있는 것을 보게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실은 모두에게 그것을 주려고 생각하고 계셨기때문에, 여기까지 온 자에게는 아낌없이,그리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똑같은 것을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부처님의 깨달음'을 '평등'하게 얻을 수 있다-----이것이야말로 《법화경》의 대정신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끝내신 세존께서는, 그 비유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를 친절하게 설하시고 난 후, 계송으롤써 거듭 똑같은 의미를 다른 말로 설하십니다. 그 안에는 특별히 중요한 요점이 있으므로,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고사리불(告舍利佛)하시되 아역여시(我亦如是)니 중성중존(衆聖中尊)이며 세간지부(世間之父)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은 개시오자(皆是吾子)어늘 심착세락(深著世樂)하여 무유혜심(無有慧心)하니 삼계무안(三界無安)이 유여화택(猶如火宅)하여 중고충만(衆苦充滿)하여 심가포외(甚可怖畏)라. 상유생노(常有生老) 병사우환(病死憂患)하니 여시등화(如是等火)가 치연불식(熾然不息)이 여래이리(如來已離) 삼계화택(三界火宅)하고 적연한거(寂然閑居)하며 안처임야(安處林野)시니라. 금차삼계(今此三界)는 개시아유(皆是我有)니 기중중생(其中衆生)이 실시오자(悉是吾子)라. 이금차처(而今此處)에 다제환난(多諸患難)이나 유아일인(唯我一人)이 능위구호(能爲救護)니라( 사리불에 이르시되, 나도 또한 이와 같음이니 모든 성인 가운데의 성존이며 세간의 아버지라, 일체 중생은 다 나의 아들이건만 세속 낙에 깊이 착하여 지혜의 마음이 없으니, 삼계가 평안함이 없음이 불이 난 집과 같아 많은 고통이 가득하여 겁 나고 두려움이라. 항상 생 노 병 사와 근심과 환난이 있음이니 이같은 불길이 솟아올라 쉬지 않는다. 여래는 이미 불난 집을 떠나 고요하고 한가로이 거하며 임야에 편안히 처하시니라, 지금 이 삼계는 다 나의 것이니 그 가운데 중생이 다 나의 아들이라, 지금 이곳에 모든 환난이 많음이나, 오직 나 한사람 만이 능히 구호하느니라.)
이 대의를 설명해 보면,
'사리불이여, 나도 지금 이 이야기의 장자와 똑같은 입장입니다. 수많이 깨달은 사람들중에 가장 높은 자로서, 세간의 아버지입니다. 모든 중생은 모두 귀여운 나의 자식들입니다. 그 자식들이 세상의 기쁨에 집착하여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는 지혜가 없기에 그것을 구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계라는 것은 범부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마치 불이 붙은 집과 같은 것으로서 갖가지 괴로움에 가득차 있어 무섭기만 합니다. 인생의 여러가지의 괴로움, 나이를 먹는 괴로움, 병의 괴로움, 죽음의 괴로움 등 수많은 걱정과 근심이 불과 같이 타오르고 있어 멈추는 일이 없습니다.
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미혹의 세계를 벗어나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있지만, 그러나 이 삼계(三界)의 일을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삼계는 모두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있는 중생은 모두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삼계는 갖가지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이 고통의 세계에 뛰어 들어 내 자식들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사람, 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