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성BORISUNG

신해품 제4 (信解品第四) ①

보리성2002-07-24 22:06조회 4No. 26
신해품 제4 (信解品第四)

   신(信)과 해(解)의 의미   '신(믿음)'이라는 것은 감정의 작용입니다. '해(이해)'라는 것은 이성의 작용입니다. 신앙이라든가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이론만이 아니며, 믿지 않으면 안된다고 사람들은 곧잘 말하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믿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그것이 하찮은 가르침이었다거나 나쁜 가르침이었다고 한다면, 자기자신을 해칠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세상까지 참혹한 해악을 끼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해도, 그 의미도 모르면서 오직 믿기만 한다면 어떤 계기로 인해 그 신앙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예를들면, 이치도 모르고, 어떤 가르침을 믿으면 병이 완치된다거나 환경도 좋아질 것이라고 믿었다고 가정합시다.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사이 또 다시 그 병이 재발하였다. 아! 이 가르침은 진실이 아니구나 하는 의구심이 마음에 생기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아이가 입학시혐에 떨어졌다. 그러자, 지금까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고집하였던 굳은 신앙이 금새 맥없이 주저앉고 마는 일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굳은 신앙'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완고한 신앙'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종교는 반드시 '이론적으로도 알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이론적으로도 알수 있는'것을 '해'라고 합니다.   종교를 이성적으로만 분석하는 것도 또한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입니다. 어느곳까지는 도달하지만, 그곳으로부터 더 깊이 들어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분수를 배웠을 때, 웬지 바보 취급당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 분수라고 하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들어 '3분의1 이라는 것을 하나의 수로서 생각하려고 노력하였다'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매우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 것이 '믿음'이고, 그것을 하나의 수로 생각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은 '믿음'을 굳게 하고자 했던 노력인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는 참으로 심오하여, 예를들어, '부처라믄 것은 우주의 진리다'라고 하는 말은 일단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그 우주의 진리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깊이 추구해 가면, 한없이 심오한 것이 있습니다. 끝없이 깊이 들어 가도 또 깊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즉, 1을 3으로 나누면, 0.333가으로 몇십행까지 나누어도 나누어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정확한 답과의 사이에는 작은 틈이 남습니다. 매우 작은 틈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느낌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터득한 이치로는 아무리 하여도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름은 잊었지만, 어느 고명한 과학자는 '오늘날의 과학적 우주는 사상사(思想史)에서 일찌기 보지 못했을 정도로 신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시인이 태양이나 달, 화산이나 폭풍에 신비를 느꼈을 때보다도, 또 그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온갖 시대의 인간이 여러가지 사상이나 신앙등에 의해 신비라는 것을 느껴 왔지만, 그 어떤 시대에서 느낄 수 있었던 신비보다도, 현재 과학의 눈으로 본 우주쪽이 훨씬 신비하다는 말입니다. 결국,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과학의 눈으로 본 우주라는 것은 더욱더 신비하게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그 신비를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 추구하려는 것이 과학의 사명이며, 그것은 그것대로 대단히 훌륭한 것이지요.   하지만, 종교에 있어서의 신앙이라는 것은 그 신비의 세계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3분의 1'라고 하는 분수를 배워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하는 그 심경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이론'이 아닙니다.'3분의 1'이라는 것이 과연 수 인가라고 이론적으로 추구해 간다 해도, 더 이상은 어쩔수 없는 일이며, '3분의 1'이라는 하나의 수로 믿어 버리는 것 외에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어쨋든, 실제로 종이를 셋으로 접어보면, 정확하게 들어맞기 때문에, 마음은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와같이, 신앙이라는 것은,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다'라는 가르침이 깊이 마음속으로 들어 오고, 그것에 의해 마음이 진실로 평온함을 얻을 수 있는 움직임이며, 이것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더우기, 이론적으로만 분석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앙은 '힘'이 없습니다. 머리속으로만 '알았다,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의 말로하자면, 에너지로 전환되지 못한다는 의미로 타인을 끌어 올리는 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에는 힘이 있습니다. 에너지가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도, '신'만 있으면 끊임없이 남을 구원하고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의 가르침이 좋지않고, 그 좋지않은 가르침을 '믿어' 버린다면, 앞에도 말했듯이, 그 에너지는 주위의 사람들이나 세상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해'가 수반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신'과 '해'의 양쪽을 함께 갖추지 않으면, 진정한 신앙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처음부터 '오직 믿어라'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주 설법을 듣고, 경도 깊이 읽어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해'가 증진하면, 자연히 '신'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소박한 사람은, '해'는 거의 진보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진정한 가르침이다'라고 듣는 것만으로도 곧 '믿음'을 일으킵니다.《법화경》의 가르침에 관한 한, 그것이라도 좋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일심으로 생각하면서, 점점 가르침의 내용을 듣거나 읽어 가는 동안에 '해'도 진보해 가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해'로 들어 가도 되고 '신'으로 들어가도 좋지만, 그러나 반드시 그 양쪽을 함께 갖추지 않으면 진정으로 힘있는 신앙이 되지는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예비지식을 갖고 '신해품'의 본문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에서 성문의 비구 사리불이 부처가 될 수 있는 보증을 받고, 또, 세존께서 '삼거화택'의 비유를 들어 그 의미를 알기 쉽게 설하시자, 법좌에 있던 혜명수보리(慧命須菩提), 마하가전연(摩訶迦전延), 마하가섭(摩訶迦葉), 마하목건련(摩訶目建連)과 같은 성문의 비구들은 더욱 더 '법'의 감사함을 알게 되어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이에, 정중히 세존께 예배하고 나서 여쭙기를,   '저희들은, 여러 제자중에서는 선배격이며, 나이 또한 많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고뇌나 번민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 이상의 노력을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더 앞으로 나아가 진정한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설법을 계속해 오셨습니다만, 실은 우리들은 설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때로는 몸이 나른해지고,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기분으로, 다만『만물은 모두 평등(공(空))하기에, 모든것을 어디까지나 평등하게 보고(무상(無相)), 어디까지나 평등하게 취급하지 않으면 안된다(無作))』는 것만을 생각해 왔습니다.   평등하다는 것의 표면에만 사로잡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대자대비의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잘 꿰뚫어 보고, 상대에 따라서 자유자재로 달리 설하며, 그 사람의 본성을 발휘시켜 결국은 사람들을 평등하게 구제하고, 세상을 맑게 한다고 하는 보살의 법』을 즐거히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생각이 미흡하였으며,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부처님께서 저희와 같은 성문인 사리불에게『그대들도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보증을 주셨기 때문에,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마운 가르침을 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한없는 진귀한 보물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굴러 들어 온 것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우리는 이같이 받아 들였습니다. 그것을 비유로써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부디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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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성의 집 · borisung.com · 2001년 원본의 메뉴·게시판·사진을 그대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