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품은 앞에서도 설명한 것과 같이, 본문에 들어 가기 전의 서문(序文)과 같은 것으로서, 수많은 보살들이 세존을 찬탄하는 것이 씌어 있습니다. 즉, 세존께서 얼마나 훌륭한 부처님인가 하는 것을 보살들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개요와 대의를 말씀드리자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노라'라고 시작하여, 어느날 세존께서 기사굴산(기사굴이라고 하는 것은 독수리의 머리라고 하는 뜻으로 영취산을 말함)의 정사(精舍)에 가셨을 때의 모습이 아름답고 장엄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세존을 둘러싼 사람들 중 먼저 대비구중이 1만2천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비구라고 하는 것은, 남자 출가자 이고,대비구중(大比丘衆)이라고 하면 사리불(舍利佛), 가섭(迦葉)과 같은 직접적인 제자들을 말합니다. 아직 보살 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소승의 가르침에 의하여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렀지요. 아라한이라는 것은 '모든 번뇌를 제거해 버린 사람' 이라는 말입니다. 또 1만2천인이란 숫자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번 큰 숫자가 나오지만, 그것들은 '많다' 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도 많이 있었습니다. 보살이라는 것은, 대승의 수행을 하는 사람이란 의미이고, 마하라는것은 '대(大)', 살이란 '사람' 이라는 의미이므로, 마하살는 '대인(大人)', 대사(大士)'로써 큰 포부를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보살은 모두 무상의 깨달음을 구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마침내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는 큰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타교를 배척하지 않음이라
천(天)이라든가 용이라든가 야차(夜叉: 추악하고 무섭게 생긴 성질이 사나운 인도의 귀신)라든가, 그 밖의 다른 귀신과 동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천이라는 것은 천상계에 있는 존재, 용이라는 것은 바다 깊숙히 살고 있는 것, 야차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 이러한 당시의 인도에서 인간에게 해를 준다고 생각되어지는 귀신과 땅에 기어다니는 파충류까지 모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의 크다란 특색입니다.
부처님은 결코 인간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려고 하시지 않고, 천지만물 모두를 평등하게 제도하려는 광범위한 자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귀신(악인)이라도 설법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또한 타교(他敎)의 신들도 배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 있습니다. 이것도 대단히 의미 깊은 일이지요.
공양(供養)
그리고 많은 비구(남자 출가자), 비구니(여자 출가자), 우바새(남자 재가수행자), 우바이(여자 재가수행자), 또 덕이 많은 국왕, 왕자, 그 신하들, 국민 그리고 애국지사, 국녀(중간 계급의 남녀), 지주, 부호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꽉 들어 차 있었으며, 그 사람들은 세존의 발 아래 꿇어 엎드리거나 주위를 돌며 귀의의 마음을 표현하고, 향을 피우거나 꽃을 뿌리며 공양을 하고 난 후에 뒷편으로 물러나 앉습니다. 공양이라는 것은, 부처님께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마음에 감사가 생기면 그것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감사는 아직 진정한 감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부처님 앞에 꽃과 차와 물을 올리고, 향을 피우고 종을 울리며 예불하는 것은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곳에 참석하고 있는 많은 보살들은 모두 진정한 대사(大士)들로서, 계(戒: 부처님의 훈계를 지키어 벗어남이 없음), 정(定: 마음이 안정되어 움직임이 없음), 혜(慧: 지혜가 깊음), 해탈(解脫: 세상의 미혹과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 해탈지견(解脫知見: 자신이 해탈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음)등의 훌륭한 덕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보살들은 또 마음이 환경의 변화에 흔들리는 일이 없고(선적(禪寂)), 언제나 하나의 도(道)를 지키어 산란한 마음이 없으며 (삼매(三昧)), 어떠한 경우에도 편안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위(無爲)),물욕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습니다(무욕(無慾)).이기적인 생각(전도(顚倒))이나 작고 하잘것 없는 것을 이것저것 생각하는(난상(亂想))것 등에 현혹되는 일도 없고, 깨끗한 마음으로 언제나 심오한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정적청징(靜寂淸澄)), 지현허막(志玄虛漠)). 이러한 마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가르친 무량의 가르침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큰지혜를 얻어'일체 만물을 확실히 꿰뚫어 보는 힘이 있습니다.
지혜(智慧)
이'지혜'라고 하는 말은 앞으로도 종종 나오기 때문에, 여기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보면,'지'라고 하는것은 모든 사물의 다른점을 분별하는 힘입니다. 장남과 차남이 어디가 다른가하는 그 '차이'를 아는 힘입니다.'혜'라는 것은 반대로 모든 사물의 공통된 진리를 발견하는 힘입니다. 장남과 차남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보면 역시 똑같은 인간으로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어서 평등하게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평등'을 아는 힘입니다. 이 두가지의 힘을 완전히 갖추어야만 세상의 모든 사물을 올바르게 꿰뚫어 볼 수가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현대과학의 방법을 보아도 역시 이에 부합하지요.
이러한 덕을 갖춘 보살들은 모든 부처님들이 법륜(法輪)을 돌리는(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는)정신에 따라서 자신들도 가르침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을 전하는 순서가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이슬방울이 마른 땅 위에 떨어지면 그 떨어진 곳만 먼지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즉, 처음에는 정말 사소한 가르침도 좋다. 그 가르침을 듣고 사람이 가지는 많은 욕심 중에서 아주 작은 먼지만큼의 욕심이 가라앉게 된다.그것이 바로 가치있는 것이며, 곧 열반(涅槃)의 문에 들어가는 입구인 것이다. 그리고는 점차 해탈(解脫)의 도를 설하며, 눈 앞의 번민이나 고뇌를 하나씩 없애준다.
또 법을 들음으로써 마음이 씻겨져 나가는 것처럼 상쾌한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무명(無明:미혹)이나 늙음, 병,죽음등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는 것에 대하여서는'십이인연(十二因緣)'의 가르침으로써,마치 소나기가 더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소생시켜 주는 것과 같이 그 고통을 없애 주게 된다. 바로 여기까지가 소승의 가르침이며, 이후에는 바야흐로 대승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십이인연
이 '십이인연'이라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의 요점 중의 하나로서, 인간(범부)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과정과 그것이 전세로부터 금세, 금세로부터 내세로 윤회(輪廻)하는 상황을 빠짐없이 설하고, 인생의 고뇌는 모두 근본의 무명(無明),번뇌가 근원이기에 이 무명을 끊음에 의해서 고뇌가 없어지고 삼세(三世:과거세,현세,미래세)에 걸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하신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지만, 이'십이인연'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나오는 '화성유품 제7'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보살은 위와 같은 순서로 중생을 교화하고, 보리(菩提:깨달음)의 싹을 나오게 하며, 사람을 인도하는 방법(방편)을 잘 터득하여 대승의 사업을 도우며, 중생이 헛걸음을 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더할나위 없는 올바른 깨달음,부처님이 얻은 깨달음)를 얻을 수 있도록 힘쓴다는 것입니다.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한다'라고 하는 말도 종종 나오고 있지만, 이 '속히'라는 것은 빨리라는 의미가 아니고 '돌아서 가지 않고 곧바로'라는 의미이지요, 사소한 것 같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다음으로 이러한 보살들이 중생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가, 또 그 덕을 여러가지 비유로써 침이 마르도록 찬탄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 비구들도 마음의 혼란함이나 산란함을 전부 없앤 훌륭한 아라한(阿羅漢)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살과 비구를 칭찬하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닙니다.얼마나 이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고 있는가 하는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단숨에 부처님과 똑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대비구나 보살들의 행동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너무나 우리들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도저히 엄두도 못낼것 같은 마음이 들겠지요. 그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아버려서는 안됩니다. 경전에 설해져 있는 많은 보살들의 덕 가운데 오직 하나에서부터라도 따라 해보는 곳에 깨달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수많은 사람중에 대장엄보살(大葬嚴菩薩)이라고 하는 훌륭한 보살이 참석자 일동의 마음이 가라앉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는 마음가짐이 확실히 이루어진 것을 보고 많은 보살들과 함께 조용히 일어나, 석가모니 세존을 경배하고 여러가지로 공양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계송을 읊으며 세존을 찬탄합니다.
이'게(偈)'라는 것은 앞서 보통의 문장으로 설한 것을 다시 반복해서 설하거나 불보살(佛菩薩)의 덕을 칭송할 때 쓰는 시(詩)와 같은 형식의 부분입니다.
먼저, 대장엄보살을 비롯한 대중은, 일체를 깨닫고 일체를 초월하며 천지의 일체 만물을 생각대로 인도해 주시는 부처님의 마음의 고귀함을 찬탄합니다. 그리고, 그 덕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는 그 얼굴과 신체와 목소리등의 아름다움을 찬탄합니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중생이 감화되어 가는 그 고마움을 칭송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존께서 긴세월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수행하시고,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어떤 고통도 견디고, 모든것을 버리며 오직 중생을 구하기 위해 진력하셨던, 그래서 결국에는 큰 지혜를 성취하여 그 지혜의 힘으로 중생을 깨닫게 하여 주신 '하기어려운 일에 힘써 주신' 그 노력에 귀의합니다 라고 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을 칭송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이상(理想)을 마음속 깊히 새기는 것입니다. 더할나위 없는 훌륭하고 완전무결한 분, 그 모습과 힘을 마음속에 그리며 우리들의 영원한 목표로 삼기 위해서입니다.행여 소흘히 읽어 넘겨서는 안 될 부분이겠습니다.
하기 힘든 일을 애씀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깝게 심금을 울리는 말이 마지막에 씌어진 '하기 어려운 일에 힘써 주심에 귀의하나이다'라는 한 귀절입니다. 대오성주(大悟大聖主)가 되신 세존의 '결과'를 칭송한 마지막 부분에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즉 그'노력'을 칭송한 것이야말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