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소의 자취를 보다(見跡)
선각자의 체험으로 된 결정체(結晶體)인 공안(公案)이나 염불, 수식관(數息觀), 흡기(吸氣) 등으로 천지를 배에 담아 아뢰야식(阿賴耶識, 阿=無,賴耶=滅盡,沒失)이 광전되지 않으면 소의 자취를 겨우 보게 된다. 깊은 산으로 도망하여 코로 천지를 한 잔으로 마시고 숨으려 하나 숨을 곳이 없다.
처음 조복받음(初調)
나에게 고삐가 있어 콱 꿰서
한 번 잡아다니고 아프게 채찍질했네.
전부터 버릇이 나빠 조복받기 어려웠는데
산동(山童)이 오히려 잘 끌고 다니네.
제3 소를 보다(見牛)
불교를 승려와 몇몇 불교학자들이 점유하는 것이라 한다면 이는 소승(小乘)불교이다. 소승에는 성문(聲聞). 연각(緣覺)들이 사제(四諦)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관하며 수행한다. 이들은 비화낙엽(飛花落葉)을 관하는 독각(獨覺)을 지칭한다. 우리는 대승불교 운동으로써 대중을 싸안는 사상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선정력(禪定力)을 활용하면 보고 듣고 아는 어느 부분으로라도 마음의 소를 볼 수가 있다. 바닷물에는 소금맛이 있고 단청 그림에는 아교풀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이, 일상 생활 가운데 법희(法喜)와 선열(禪悅)을 얻어서, 오고 가는데 광명이 있고 선정(禪定)에 깊이 빠져 들면 들수록 온통 존재의 광희(狂喜)로움 뿐이다.
조복받다(受制)
점점 조복을 받으니 바쁘게 설치는 것 쉬었네.
물을 건너 구름을 헤쳐도 어디든지 따라와
손에 쥔 고삐 조금도 늦추지 않지만
목동은 하루 종일 피곤함 잊었네.
제4 소를 잡다(得牛)
소를 보는 것은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가장 중요시하는 점은 석가 세존께서 새벽별을 보시고 도를 깨닫자 삼라만상이 한꺼번에 모두 성불(成佛)한 순간이다.
오랫동안 소를 밖에서 찾다가 점점 안과 밖이 원융하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닌 마음 소(心牛)를 체득하였다. 그 마음 소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지극히 승묘(勝妙)함에 있는 것이어서 정념(正念)의 상속됨이 매우 힘들다.
삼독(三毒)과 오욕(五慾)의 번뇌는 소가 녹음 방초 우거진 언덕을 그리워함과 같다. 그러나 그것들은 미세한 부분이 해소되지 않아도 선정력을 왕성히 하면 자연히 사라진다. 하여 망상없는 마음이 끝없이 이어진다.
인간의 무명(無明)에는 본능적인 요구가 극히 강하므로 대용단의 정진이 필수품이다. 한고비 넘은 경지에서 혹은 향상문(向上門)에 서서 고봉정(孤峰頂)에 오르기도 하고 혹은 향하문(向下門)의 십자가두(十字街頭)에서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劍)을 쓰는 공부가 있다.
머리를 돌이키다(回首)
오랫동안 공력(功力)이 깊으니 비로소 머리를 돌이켰네.
미치고 뒤바뀐 마음 점점 다스려 부드럽게 되었네.
산동은 아직도 미덥지가 않은지
잡고 있던 고삐를 또 매어 놓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