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선사의 행적과 법을 얻은 내력[禪師行由得法事意]
집을 나와 황매산을 찾다[割愛出家參詣黃梅]
[원문]
혜능이 말했다.
'나도 또한 이 게송을 외워 오는 세상의 인연을 맺고 함께 부처님의 땅에 태어나고자 하오. 스님이여, 나는 방앗간에서 여덟달 남짓 있는 동안 조사가 계신 방앞에 일찌기 가보지 못했습니다. 제발 스님은 나를 게송이 붙여진 곳에 이끌어주어 게송에 절하게 해 주오.'
어린 스님이 게송 앞에 이끌어주므로 게송에 절하고 혜능이 말했다.
'혜능은 글을 모르니 제발 스님은 읽어주시오.'
그 때 강주에서 별가(別駕)벼슬을 지낸 장일용이란 사람이
큰 소리로 게송을 읽었다. 혜능이 듣고 나서는 말했다.
'나한테도 한 게송이 있으니 별가께서는 써 주십시요.'
별가는 말했다.
'이 오랑캐야, 너도 게를 짓는다 하니 이런 일은 참으로 못 보던 일이다.'
혜능이 별가를 깨우쳐 말했다.
'위없는 보리를 배우고자 하면 처음 배우는 이를 가벼이 하지 말아야 하오. 가장 낮은 사람에게도 가장 높은 지혜가 있기도 하고, 가장 높은 사람에게도 지혜가 없기도 하오. 만약 사람을 가볍게 여기면 한량없고 끝없는 죄가 있을 것입니다.'
이에 별거가 놀래 말했다.
'그대는 게를 외우기만 하시오. 내가 당신을 위해 써주겠소. 당신이 법을 얻으면 먼저 반드시 나를 건져주시오. 이 말을 잊지 마시오.'
혜능이 게를 읊었다.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도 또한 대가 아니네.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어느 곳에 티끌 먼지 일어나리오.
이 게를 쓰고 나니 대중이 모두 놀래 뜻밖의 일로 생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각기 서로 말했다.
'기이하다.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취해서 안되겠구나. 어떻게 해서 오랫동안 저 육신보살을 우리가 부려먹었단 말인가.'
조사께서는 뭇 사람들이 놀라 기이해함을 보시고 사람들이 해칠까 저어하시어 신으로 게송을 지워 버리시고 말씀하셨다.
'이 게송 또한 참모습 보지 못한 것이다.'
이에 뭇 사람들이 듣고 의심을 쉬었다.
다음날에 조사께서 가만히 방앗간에 이르러 혜능이 돌을 짊어지고 방아 찧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도를 구하는 사람이 법을 위해 몸을 잊어버림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리.'
그리고는 곧 물으셨다.
'쌀은 잘 여물어 익었느냐?'
혜능이 말했다.
'쌀이 익은 지 오래지만 아직 체질을 못하고 있습니다.'
조사께서 지팡이로 방아를 세 번 내리치시고는 가셨다. 혜능이 곧 조사의 뜻을 알고 삼경에 조사의 방에 드니,조사께서 가사로 둘레를 가려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금강경』을 설해 주셨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데 이르러 말 아래[言下]온갖 모든 법[一切萬法]이 자신의 참성품 떠나지 않음을 크게 깨쳤다.
드디어 오조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어찌 자신의 참성품이 본래 스스로 깨끗함을 기약하며,어찌 자신의 참성품이 본래 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음을기약하며, 어찌 자신의 참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춤을 기약하며, 어찌 자신의 참성품이 본래 흔들려 움직임 없음을 기약하며, 어찌 자신의 참성품이 능히 만 가지 법 냄을 기약하겠습니까?'
조사께서 내가 본래의 참성품 깨친 줄 아시고 그 자리가 바로 대장부(大丈夫)며 하늘과 사람의 스승[天人師]이며 붓다[佛]라고 이름하셨다. 삼경에 법을 받으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했다. 곧 돈교(頓敎)와 가사와 바루를 전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너를 제육대조로 삼으니 스스로 잘 보살펴 생각하여 널리 뭇 삶들을 건지고 미래에까지 흘러 넓혀서 끊어짐이 없도록 하라. 나의 게를 들으라.'
뜻 있는 이가 와 씨앗을 내리니
땅을 인해 열매가 도리어 나네.
뜻이 없으면 이미 씨앗이 없으니
성품도 없고 또한 생겨남도 없다.
* 해설 *
덕이본과 종보본에서 '깨달음에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도 또한 대가 아니네./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어느 곳에 티끌 먼지 일어나리오' 라고 한 혜능선사의 게송은 돈황본『단경』에서는 다음 두 게송으로 나타나고 있다.깨달음에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없네.
불성은 언제나 깨끗하니
어느 곳에 티끌 먼지 있으리오.
마음은 깨달음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대다.
밝은 거울 본래 깨끗하니
어느 곳에 티끌 먼지 물들리오.
뒤에 편집된 덕이본『단경』의 게송에서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 라고 한 소극적 표현을 위의 첫 게송은 '불성이 늘 깨끗하다(佛性常淸淨)' 고 달리 표현하고 있다.그런데 중생의 번뇌와 모든 존재가 본래 공하기 때문에 불성의 공덕이 청정한 것이므로 두 표현은 다른 법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뒤의 게송에서 '마음은 깨달음의 나무요. 몸은 곧 밝은 거울의 대다' 라고 한 귀절은 몸과 마음의 순서만 바뀌었을 뿐 신수선사가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와 같네' 라고 한 표현과 다르지않다. 그리고 그 말은 불성이 늘 깨끗하다 함의 비유적인 표현이니, 이로써 보더라도 신수선사의 게송이 다만 점수문에 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수선사가 '때때로 털고 닦으라' 고 말한 것은 털고 닦을 것이 본래 없는 본분(本分)에 강조의 주안점을 두지 않고, 번뇌와 집착을 다스리지 못하고[不調伏]있는 범부를 상대하여 방편으로 번뇌를 조복하여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권유하고 있으니, 이는 천태선사의 네 가지 사제법으로 보면 생멸사제(生滅四諦: 소외의 인과와 해탈의 인과가 없지 않은 곳에서 해탈의 길을 보임)의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혜능선사가 '불성이 늘 깨끗하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노래한 것은 번뇌가 본래 일어난 바가 없는 줄 모르고 억지로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집착을 깬 것이니, 이는 천태선사의 네 가지 사제법으로 보면 무생사제(無生四諦: 소외의 인과와 해탈의 인과가 공한 곳에서 해탈의 길을 보임)의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혜능의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가르침을 번뇌가 본래 공한 줄 요달한 곳에서 비로소 닦음 없는 묘한 닦음이 현전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그러한 본바탕[自然體]'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고요함[寂滅性]에 앉아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니, 영명연수선사는『종경록』에서 혜능의 게송을 잘못 이해하여 닦음을 폐기하고 실천행을 방기하는 이들에게 다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대감혜능선사는 외짝눈 갖춤에 그치고
대통신수선사는 두 눈을 두렷이 밝혔다.
이 한 귀절은 종문(宗門)에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한 귀절이다. 이는 선에 관한 천태와 달마, 남종과 북종의 주도권 싸움에서 형편없이 낮게 평가된 신수선사에 대한 복권의 뜻도 담고 있으며, 또한 본래 청정함을 지키어 묘한 닦음을 폐기해버리는 당대의 말폐적 수행관에 대한 영명 선수선사의 날카로운 비판의 뜻도 담고 있다. 그러나 위 귀절의 뜻을 또한 혜능은 공을 요달한 혜안(慧眼)만을 갖추었고, 대통신수선사만이 공(空)과 있음[有]을 함께 비추는 중도의 바른 눈[中道正眼]을 갖추었다고 해석해서도 안될 것이니, 혜능선사가 갖춘 외짝눈은 있음과 닦음의 실체성을 깨뜨림으로써 있음이 있음 아니되 있음 아님도 아닌 중도정안(中道正眼)을 바로 열어보이며, 닦을 것이 없되 닦지 않을 것도 없는 참된 닦음을 곧장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혜능선사의 이러한 입장은『단경』의 본문 가운데 홍인선사의 장실(丈室)에 들어가『금강경』의 설법을 다시 듣고 스승께 '자성이 본래 청정하므로 청정하다 할 것도 없고,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으므로 스스로 갖추었다고 할 것도 없다' 라고 술회한 다음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찌 자신의 참성품이 본래 스스로 깨끗함을 기약하며, 어찌 자신의 참성품이 본래 나지 않고 멸하지 않음을 기약하며, 어찌 자신의 참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춤을 기약하며, 어찌 자신의 참성품이 본래 흔들려 움직임 없음을 기약하며, 어찌 자신의 참성품이 능히 만 가지 법 냄을 기약하겠습니까.
불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므로 그 청정하다는 모습도 세울 것이 없다는 혜능선사의 말씀을 이어, 혜능선사를 동산법문의 정통조사로 현창한 하택신회선사는, 우리 스승의 가르침은 조복(調伏)과 불조복(不調伏)을 모두 뛰어넘었다고 말하여, 돈오(頓悟)의 길은 번뇌를 여의지 못하고 번뇌에 헤매는 삶과 번뇌를 억지로 끊고 해탈을 얻으려는 집착을 함께 버림을 보인다. 곧 본래 청정하다고 함은 번뇌가 실로 있다는 집착을 깨기 위해서 청정하다고 했을 뿐, 본래 청정함도 하나의 정해진 모습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뒷 대의 여러 선사들[高松老人云]도 영명이 말한 혜능의 외짝눈은 '온 대지가 사문의 외짝눈이다(盡大地是沙門一隻眼)'라고 한 그 외짝눈이며, '하늘 땅을 잡아 정하는 눈[把正乾坤眼]'이자 '이마의 금강의 눈[頂門金剛眼]'이라고 한 바로 그 눈이라고 말하였다.
천태지자선사의『마하지관(摩訶止觀 卷第八上)』은 조복과 불조복을 넘어서서 닦음과 깨침이 둘 없는 중도의 바른 눈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사의한 경계[不思議境]란 저『무행경(無行經)』에서 '탐욕이 곧 도이며 성냄과 어리석음 또한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가운데 온갖 불법을 갖추었다' 고 말함과 같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모습[四分]이 곧 도 이지만 거듭 그대로 따라서는 안되니, 따르면 사람을 이끌어 악도에 향하게 하고, 다시 끊어서는 안되니 끊으면 증상만을 이룬다 . 어리석음과 탐애를 끊지 않고 삼명과 팔해탈을 일으키면 이를 도라고 이름하니, 그 사람은 조복함에도 머물지 않고 조복하지 않음에도 머물지 않는다.
조복하지 않음에 머물면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고, 조복함에 머물면 이것은 성문의 법이다.
왜 그런가? 범부는 탐욕의 물듬을 따라 네 가지 모습의 나고 죽음이 거듭 쌓이고, 어지럽게 다투어 다스릴 수 없으므로 조복하지 않음이라 이름한다. 이승의 치우친 수행자는 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원수가 뒤쫓는 것 처럼 삼계를 빨리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에 억지로 조복함이다.
아라한도 조복하지 않음이라 말하니, 그것은 삼계의 미혹이 다해 미혹을 다할 것이 없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혹을 다 끊어 없앴기 때문에 조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조복되어짐이라 이름할 수 있으니, 그것은 번뇌의 씨를 태워 나지 않게 하고 뿌리를 없애 쓸모없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살은 그렇지 않다, 나고 죽음에 대해서도 용맹스러움이 있고 열반에 대해서도 탐착하지 않는다. 나고 죽음에 용맹스러우므로 남이 없이 태어나 나는법에 의해 물들지 않으니,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 있는 것 같고 의사가 병을 나아줌과 같다.
열반에 탐착하지 않으므로 공이 공하지 않음을 알아서 공한 법으로 깨달음을 삼지 않으니,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아가되 허공에 머물지 않는 것과 같다. 보살은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며 오욕을 끊지 않고 육근을 깨끗이 하니, 이것이 곧 조복함에도 머물지 않고 조복하지 않음에도 머물지 않는 뜻이다.
『마하지관』에서 조복과 불조복의 치우침을 모두 넘어선 중도의 길은 범부의 번뇌를 조복하지 못하는 삶[不調伏相]과 번뇌를 억지로 조복하여 열반을 이루려는 이승의 길[調伏相]을 함께 부정한다. 나아가 번뇌의 씨앗을 끊어 없애버린 적멸한 곳에 앉아 이미 번뇌의 뿌리를 말려 없앴기 때문에 다시 조복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아라한의 집착[不調伏相]까지 모두 께뜨린다.
노행자가 지어 바친 한 게송 또한 신수의 닦아감에 대해 닦을 것 없음을 보였지만, 공에 떨어짐이 없이 조복과 불조복, 닦을 것 있음과 닦을 것 없음을 뛰어넘어 중도의 바른 눈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노행자는 한 밤중에 장실에 들어 조사가 설하는『금강경』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는 곳에서 다시 한번 경전의 가르침과 자신의 깨달음이 확연히 둘이 없음을 검증해 마치니, 이것이 바로 교(敎)와 관(觀)의 하나됨[敎觀一致]이다.
『금강경』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음'이 있음에도 머물지 않고 없음에도 머물지 않는 선정[不住生死 雙遮有無]을 말한다면, '그 마음을 낸다'고 함은 있음을 있음 아닌 있음으로 살려내고 없음을 없음 아닌 없음으로 살려내는 지혜이며 행이다[不住涅槃 雙照有無]. 곧 혜능이 활연히 계합한『금강경』의 한 귀절은 '행하되 행함이 없고 행함 없되 행함 없음도 없는 창조적 실천의 길[無住妙行]'이니, 바로 '그침 그대로의 살핌[卽止之觀]이 살핌 그대로의 그침[卽觀之止]이 되는 중도의 길[止觀俱行]'인 것이다.
노행자가 중도정관을 통달함에 조사가 가사와 바루를 내리니, 이는 법에 대한 믿음을 물질로써 보임이며, 전법게(傳法偈)를 써서 보이니 실상반야를 문자로써 서로 검증해 보임이다.
오조 홍인선사의 전법게는 돈황본과 덕이 종보본의 문장이 서로 다르니 대조하면 다음과 같다.
<돈황본>
뜻 있는 이가 와 씨앗을 내리니
땅은 뜻 없지만 꽃이 피도다
뜻 없고 또 씨앗 없나니
마음 땅에 또한 남이 없도다.
<덕이 종보본>
뜻 있는 이가 와 씨앗을 내리니
땅을 인해 열매가 도리어 나네.
뜻이 없으면 이미 씨앗 없으니
성품도 없고 또한 남도 없도다.
게송의 앞 귀절은 뜻이 있는 중생이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땅에 씨앗을 뿌리므로 아무런 뜻이 없는 땅에서 꽃이 피고 열매 맺게 됨을 나타내고. 뒤의 두 귀절은 뜻 없는 땅 자체는 사람이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꽃과 열매를 낼 성품도 없고 꽃과 열매가 나지도 않음을 나타낸다.
위 게송은 씨앗과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뜻과 씨앗이 떨어지는 땅과 땅에서 피어나는 꽃과 열매의 상호관계를 비유로 들어, 중생이 마음의 땅에 깨달음의 씨앗을 내리고 그 씨앗이 원인이 되어 깨달음의 결과가 삶의 터전에서 일어남을 나타내고 있다.
곧 오조선사의 게송에서 앞의 두 귀절은 중생이 보리의 뜻을 발하여 법을 듣고 수행하여 깨달음에 나아가는 인과를 나타낸다. 반면, 뒤의 두 귀절은 무정물은 뜻이 없어서 깨달음의 씨앗을 내릴 수 없으므로 깨칠 수 있는 성품도 없고 깨달음의 결과도 날 수 없음을 들어, 본래 끊을 번뇌도 없고 얻어야 할 깨달음도 없는 본분(本分)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인과가 공한 본분은 인과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니, 번뇌가 본래 공한 곳에 서서[本證]닦음 없는 묘한 닦음을 일으키는 자가 씨앗을 내려 열매 얻는 인과의 필연성 속에서 인과에 막힘없이 본분의 해탈경계를 자재하게 쓰게 되는 것이다.
옛 사람[悅齋居士]은 그러한 뜻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동쪽 고개 구름 돌아가는 곳이요
서쪽 강은 달이 떨어지는 때로다.
그 가운데 분명하고 바른 뜻이란
한 생각도 범하지 않음이라네.
<『선문염송』57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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