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성BORISUNG

☆해설6/ 인종법사를 만나 동산법문을 열다

보리성2002-01-16 21:00조회 2No. 39
2.선사의 행적과 법을 얻은 내력[禪師行由得法事意] 인종법사를 만나 동산법문을 열다[遇印宗師 開東山門]
 혜능이 뒤에 조계(曹溪)에 이르러 또 몹쓸 사람들에 쫓기게 되었다. 이에 사회현(四會縣)에서 그 어려움[難]을 피해 사냥꾼 가운데 15년을 지냈는데, 그 동안 사냥꾼들에게 상황에 맞춰 법을 설했다. 사냥꾼들이 늘 그물을 지키게 했는데 매번 산 목숨을 보면 모두 놓아주었다. 밥 때에는 나물을 고기 삶은 솥에 붙여 먹었다. 누가 묻게 되면 고기 가에 얹은 나물만을 먹는다고 대꾸하였다.  하루는 이렇게 생각했다.  '법을 펼 때가 되었으니 끝내 달아나 숨어 있을 것이 없다.'  드디어 광주 법성사(廣州法性寺)에 이르렀는데, 인종법사가『열반경』강의하는 것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니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고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여 의론이 그치지 않았다. 혜능이 나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오. 당신들의 마음[心]이 움직인 것이오.'  한군데 모인 대중이 놀라므로 인종이 윗자리로 이끌어 깊은 뜻을 밝혀 묻고서 혜능의 말이 간단하고 이치에 맞으며 문자에 말미암지 않은 줄 보았다. 인종이 말했다.  '행자는 정말 보통분이 아닙니다. 황매의 가사와 법이 남쪽으로 왔다고 오래도록 들어왔는데, 행자가 그 분이 아니십니까?' 혜능이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인종이 이에 제자의 예를 지어 전해온 가사와 바루를 대중에게 내 보이기를 청하고 다시 물었다.  '황매에서 부촉하실 때 어떻게 가르쳐 주셨습니까?'  혜능이 말했다.  '가르쳐 주심은 따로 없고 오직 참성품 보는 것[見城]만 논 하고 선정 해탈을 논하지 않았습니다.'  인종이 말했다.  '왜 선정 해탈을 논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두 법이므로 불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종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둘 아닌 법입니까?'  혜능이 말했다.  '법사께서『열반경』을 강의하여 불성을 밝게 보면 이것이 불법의 둘 아닌 법입니다. 그것은『열반경』에서 고귀덕왕보살이 부처님에게 다음처럼 물음과 같습니다.  〈네 가지 무거운 금계를 범하고 다섯 가지 큰 죄를 지은 자 그리고 일천제(一闡提) 등은 불성의 착한 뿌리가 끊어집니까?〉  그 물음에 부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착한 뿌리에는 둘이 있으니 하나는 항상함이요 둘은 덧없음 이다. 불성은 항상함도 아니고 덧없음도 아니니, 그러므로 끊어지지 않음을 둘 아님이라 한다. 착한 뿌리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착함이요 둘은 착하지 않음이다. 불성은 착함도 아니고 착하지 않음도 아니니 이것을 둘, 아님이라 한다. 온(蘊 :skandha)과 계(界 :dhatu)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이는 요달하여 그 참모습에 둘이 없으니 둘 없는 성품이 바로 불성이다.〉'  인종이 설함을 듣고 기뻐 합장하고 말했다.  '제가 경을 강의하는 것은 기와조각과 같고 인자께서 뜻을 논 함은 참 금과 같습니다.'  이에 인종이 혜능을 위해 머리를 깍아주고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니 혜능이 드디어 보리수 밑에서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열게 되었다.  혜능이 동산에서 법을 얻고 쓰라린 고통을 다 받으면서 목숨이 가는 실과 같았으나, 오늘 사군 관료와 출가대중, 공부하려는 일반대중과 이렇게 한 모임에 같이 하였으니, 이것은 오랜 겁 동안의 인연 아님이 아닌것이다. 또한 지난 생 가운데 여러부처님께 공양하고 함께 착한 뿌리를 심어서 이제 비로소 위와 같은 돈교(頓敎)의 법 얻은 인연을 듣게 된 것이다.  가르침은 바로 앞 성인들의 전하신 바요, 혜능 스스로의 지혜가 아니니, 앞 성인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자는 각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듣고 각기 스스로 의심을 없애면 앞대 성인과 다름이 없게 될 것이다.'  함께 모인 대중이 법을 듣고 기뻐하며 절하고 물러났다.   * 해설 *  노행자가 황매산에서 법을 얻은 뒤 시절인연을 기다려 15년을 사냥꾼 틈에서 숨어지내다 비로소 세상에 나와 법을 설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인종법사의『열반경』설법 회상에서 이루어진다. 인종과의 법의 인연을 통해 노행자는 이제 출가사문인 혜능으로서 달마로부터 내려온 의발(衣鉢)의 전수자로서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낸다. 『전등록』의 기록에 의하면 광주 법성사(廣州 法性寺) 인종법사는 열반대부에 정통한 고승으로서, 이미 나라에서 수도의 대경애사(大敬愛寺)에 살도록 조칙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기주로 가서 홍인선사를 뵈었다 한다.  나중 광주 법성사에서『열반경』을 강설하다 혜능선사를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그 움직임이 '깃발이냐', '바람이냐'를 다투는 이야기는『단경』의 귀절 가운데 가장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법문이다. 이 법문에는 세계운동의 참모습에 관한 존재론적인 물음이 제기되고 있고, 다시 의식과 존재의 상호관계에 관한 인식론적인 물음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위 법문의 가장 오래된 형태이자 가장 자세하게 법문의 내용을 전해주고 있는『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중 혜능은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여 늘 숲속에서 숨어 지냈다. 때로 신주(新州)에 있기도 하고 때로 소주(韶州)에 있기도 하여 17년을 세속에 살면서도 법을 설하지 않았다. 나중 남해 제지사(制止寺)에 이르러 인종법사가 『열반경』강설하는 것을 만났다. 혜능도 또한 자리 아래에 있었는데 그때 인종이 대중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모두 바람이 깃대 끝에 불어서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는가?"  대중이 말했다.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본다' 하며,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는 자가 움직인다'라고 하여 이와 같이 묻고 따짐이 결정되지 않았다.  혜능이 자리 아래에 서 있다 법사에게 답하였다.  "스스로 뭇 사람의 망상의 마음이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법은 본래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없습니다."  법사가 말하는 것을 듣고서는 놀래고 아득하여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러고는 혜능에게 물었다.  "거사는 어디에서 오셨소?"  혜능이 답했다.  "본래 오지 않았으니 지금 또한 가지 않소."  법사가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혜능을 맞이하여 방에 가 자세하게 물으니, 혜능이 동산의 불법과 부촉받은 믿음의 가사가 있음을 낱낱이 갖추어 말하였다.
『역대법보기』의 기록은 혜능의 답변이 깃발의 움직임으로 대표되는 세계운동의 참모습을 해명한 것으로 나타난다.깃발의 움직임은 깃발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깃발을 떠난 것도 아니고, 바람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바람을 떠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깃발의 움직임은 움직임없는 움직임이니, 깃발이 움직인다 해도 세계운동의 실상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 뜻을『역대법보기』는 법은 본래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깃발이 움직이느니 바람이 움직이느니 보는 마음이 움직이느니 하는 것은 망상심이라 말한다. 『단경』에서 깃발이 움직임도 바람이 움직임도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함은『역대법보기』와 같은 내용을 달리 표현한 것이지만, 그 분위기는『역대법보기』와는 달리 세계와 인간의식의 중도적 관계에 강조점을 둔 표현이 된다. 『단경』의 이 귀절과 유사한 표현이『오등회원(五燈會元 卷一)』에도 나온다. 그 기록은 이렇다.
 인도 18조 가야사다존자가 바람이 방울을 불어 흔드는 소리를 들었는데 17조가 물었다.  "방울이 우느냐, 바람이 우느냐?"  가야사다존자가 답했다.  "바람이나 깃발이 우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웁니다."
『단경에서 바람인가 깃발인가를 묻는 물음과 17조 조사가 방울이 우는가 바람이 우는가를 묻는 물음은 그 물음의 낙처(落處)가 다르지 않다. 지금 방울소리든 깃발의 움직임이든, 세계운동은 그 운동이 운동 아닌 운동이므로 그것은 지금 아는 주체의 마음 밖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아는 마음의 토대이자 아는 마음 자체로 떠오른다. 그러므로 마음은 여기 있고 법은 저기 있지 않고, 법일 때 그 법은 마음인 법이고, 마음일 때 그 마음은 법인 마음이다.  다만 사람이 마음을 집착하면 법을 들어 마음을 깨뜨리고, 법을 집착하면 마음을 들어 법을 깨뜨린다.  설두중현(雪竇重顯)선사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님이여 납자들은 이 말을 흘러 통하게 하네. 강 건널 때 뗏목 씀은 예삿일이니 남산에서 숯 태우니 북산이 붉네.
 위의 게송에 의거하면 혜능선사가 마음[心]이라고 답변함은 세계를 세계로 보는 이들에게 저 세계가 바로 마음인 세계임을 보인 것이니, 마음이라는 말을 듣고 또 세계 밖에 마음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조사의 뜻은 마음과 법에 모두 머뭄 없는 해탈의 한 길을 열어준 것이니, 이 뜻을 모르고 갖가지 이치와 분별을 붙여 풀이하는 것은 조사의 뜻과는 십만팔천리나 아득한 것이다.  천태덕소선사는 다음과 같이 대중에게 보여 경계한다.
 천태덕소국사가 대중에게 보여 말씀하셨다.  "옛 성인의 방편은 간지스강 모래수와 같다. 육조께서 '바람과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시니, 이는 위없는 심인(心印)이요 지극히 묘한 법문(法門)이다.  우리들은 조사 문하의 수행자라 칭하니, 이 가르침을 어떻게 아는가.  만약 바람과 깃발은 움직이지 않고 너희 마음이 망녕되이 움직인다고 하거나, 만약 바람과 깃발을 없애버리지 말고 바람과 깃발 있는 곳에 나아가 통해 취하라고 말하거나, 만약 바람과 깃발 움직이는 곳은 이 무엇인가라고 말하거나, 만약 사물에 붙여 마음을 밝힌 것이니 반드시 사물로 알지 말라고 말하거나, 만약 색이 곧 공함이라고 말하거나, 만약 바람과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니 반드시 묘하게 알라고 말하거나 하면, 조사께서 보인 뜻과는 어울릴 수가 없다.  이미 이와 같은 갖가지 알음알이가 아니라면 합당히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만약 참으로 보아가면 무슨 법문을 밝히지 못할 것인가.  비록 백천의 모든 붓다의 방편일지라도 한 때에 환히 사무치게 될 것이다."
 앞의 설두선사와 덕소선사에 의하면 조사의 가르침은 모두 중생의 망집을 깨서 반야의 바른 눈을 열어주기 위한 언교의 시설이다. 곧 때로 마음을 세우고 법을 세우는 것은 강을 건너 저 언덕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배와 뗏목을 씀과 같으니, 저 언덕에 이르면 마음도 세울 것이 없고 법도 세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과 법이 모두 그것 아닌 그것임을 통달하여 마음과 법에 가히 버릴 것이 없는 줄 아는 이가, 마음과 법을 새로 세울 것도 없는 줄 알아 걸림 없는 해탈의 삶을 산다 할 것이니, 심문분선사(心聞賁禪師)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물가에 서린 연기 푸른 버들 감싸고 대숲에 구름 깊어 옛집은 나직하네. 온 산천이 푸르러서 봄이 벌써 저무는데 오동꽃 땅에 가득 소쩍새는 우지짓네.
 인종은 노행자와 문답한 뒤 그가 황매의 법을 얻은 이인 줄 알고, 가사와 바루를 대중에게 보이게 하고 동산법문의 요점을 묻는다.  혜능은 동산법문의 요점을 '오직 견성만을 말할 뿐 선정해탈을 논하지 않음'이라 제시한다. 여기서 견성이 '존재의 실상을 통달하여 실상 그대로의 삶의 자유를 열어내는 일'이라면, 선정해탈은 자기 안에 닫혀진 선정을 통해 경험의 세계를 확장하거나 지금의 상태보다 고양된 체험의 세계를 얻어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견성법이 인과의 질곡 속에서 그것의 공성(空性)을 통달하여 다시는 인과의 틀에 갇히지 않는 머뭄 없는 행이라면, 선정해탈은 인과의 질곡과 이원적인 대립에 갇혀진 행위인 것이니, 그 뜻을 혜능은 '두 법이므로 불법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초기 불교의 교설로 보면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통달하여 아(我)와 무아(無我), 상(常)과 무상(無常)에 머물지 않는 행이 니르바나이며 견성이라면, 선정 닦음[修定]이나 고행(苦行)을 통해 내면의 영적 신비에 돌아가거나 보다 높은 정신세계에로 비약하려는 것이 선정해탈법이다. 견성법은 주체적이지만 결코 유아론적 경지나 나 안에 닫혀진 체험이 아니다. 그러므로 견성이 경험의 공성을 통달하여 인간 행위를 있음과 없음에 걸리지 않는 창조적인 행위로 전환시켜내는 일이라면, 선정해탈법은 지양되지 못한 체험과 경험의 확대 발전이거나 내적 심화인 것이니, 붓다가 제시한 연기론의 실천이 아닌 것이다.  혜능선사는 둘 없는 불법의 큰 뜻을『대열반경(大涅槃經 二十二)』을 통해 다시 가르치고 있으니, 선사의 법문에 상응한 경의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광명변조 고귀덕왕 보살이 붓다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거운 계를 범하고 방등경을 비방하며, 오역죄를 지은 일천제 등은 불성이 있는 자들인데, 어떻게 다시 지옥에 떨어집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이들이 불성이 있다 한다면 어찌 다시 상락아정의 공덕이 없다 말씀하십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선근을 끊어버린 자를 일천제라 하면 선근을 끊을 때 불성은 왜 끊이지 않습니까? 불성이 만약 끊어지면 어찌 다시 상락아정이라 말합니까? 만약 불성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왜 일천제라 말합니까?"  선남자여 선근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안[內]의 선근이고, 둘째 밖[外]의 선근이다.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므로 불성은 끊어지지 않는다.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유루(有漏)와 둘째 무루(無漏)이다. 불성은 유루도 아니고 무루도 아니므로 끊어지지 않는다.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항상함[常]이요, 둘째 덧없음[無常]이다. 불성은 항상함도 아니고 덧없음도 아니므로 끊어지지 않는다.
 『열반경』에 의하면 참된 공덕의 성취는 주어진 삶의 모순 속에 이원적 대립이 남아 있는 한 구현되지 않는다. 불성은 모순 너머에 있는 신비한 실재가 아니니, 모순 속에서 모순의 실체성을 뛰어넘음으로써 모순이 모순 아닌 삶의 실상을 체현하는 곳에 불성의 실현이 있다.  붓다가 설한 항상함은 존재가 덧없이 흘러버린다는 집착을 깨기 위한 가르침이고, 덧없음은 존재에 변하지 않는 고정된 덩어리가 있다는 집착을 깨기 위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참된 선근은 항상함과 덧없음, 나 있음[我]과 나 없음[無我]을 뛰어넘을 때 성취되는 것이니, 불성의 뜻을 아는 자는 끊어짐과 끊어지지 않음을 넘어서며, 샘[有漏]과 새지 않음[無漏]을 뛰어넘어 생사윤회 속에서도 따라 흘러가지 않으며, 열반의 고요함에도 안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열반경』의 말씀을 들어 보여준 바 불성의 뜻을 다시 어떻다고 말할 것인가.  인연으로 일어나는 업의 모습에 따르되 따름이 없고, 따름이 없되 따름 없음도 없는 이가 늘 불성의 뜻을 드러내 쓰는 자가 아닌 것인가.  옛사람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지 못했는가.
천 갈래 물이랑 속 물고기가 뿔을 내고 만길 벼랑 끝 호랑이는 바람 속에 울부짖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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