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선지식이여, 깊고 깊은 법계와 반야삼매에 들고자 하면 반드시 반야행을 실천하여『금강반야경』을 외어 지니면 참성품을 보게 될 것이다. 마땅히 알라.『금강반야경』을 외우는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으니, 그것은 경 가운데 분명히 찬탄하였으므로 갖추어 다 말할 수 없다.
이 법문은 가장 높은 진리의 수레[最上乘]라 크게 지혜로운 사람을 위해 설하며 근기가 높은 사람을 위해 설함이니, 지혜와 근기가 작은 사람이 들으면 믿지 못하는마음을 내게 된다.
왜 그런가? 비유하면 큰 용이 우리가 사는 이 염부제에 비를 내리면 도시와 마을이 모두 대추잎처럼 떠내려 가지만, 큰 바다에 비를 내리면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것과 같다. 만약 크나큰 진리의 수레에 탄 사람[大乘人]과 가장 높은 진리의 수레에 탄 사람[最上乘人]이 이『금강경』설함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달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알라. 본성품[本性]에 스스로 반야의 지혜가 있어서 스스로 지혜를 써서 늘 살펴 비추므로 문자를 빌지 않는다.
비유하면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용이 비를 일으켜 모든 삶들과 모든 풀과 나무, 유정, 무정을 모두 다 적셔주며, 백개 냇물의 여러 흐름이 큰 바다에 들면 한 물, 한 몸으로 합치는 것과 같이 중생의 본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다.
선지식이여, 근기가 작은 사람이 이 돈교(頓敎)를 들으면,마치 뿌리가 튼튼하지 못한 풀과 나무가 큰 비를 맞으면 모두 넘어져 자라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근기가 작은 사람이 감당하지 못함도 또한 이와 같다.
원래 반야의 지혜가 있는 것은 크게 지혜로운 사람과 차별이 없는데 왜 법을 듣고도 스스로 깨닫지 못할까? 삿된 견해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에 그러하니,마치 큰 구름이 해를 덮어서 바람이 불지 않으면 햇빛이 나타나지 않음과 같다.
반야의 지혜 또한 크고 작음이 없지만, 온갖 중생이 자기 마음의 헤매임과 깨달음[迷悟]이 같지 않아서 마음을 헤매어 밖을 보고 수행하여 붓다를 찾으므로 자신의 참성품[自性]을 깨치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작은 근기이다,
만약 돈교를 활짝 깨쳐 밖을 향해 닦는 것을 집착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의 마음속에 늘 바른 견해[正見]을 일으켜 번뇌 티끌에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참성품을 봄[見性]이다.
선지식이여, 안과 밖에 머물지 않고 오고 감이 자유로워 집착된 마음을 없애면 통달하여 걸림 없으니, 이러한 행을 닦을 수 있으면『반야경』과 본래 차별이 없을 것이다.
선지식이여, 모든 경장과 문자로 된 대소승의 십이부경이 모두 사람으로 인해 두어진 것이며 지혜로 인해 바야흐로 세워진 것이니, 만약 세상사람이 없으면 만 가지 법이 본래 스스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만 가지 법이 본래 사람으로부터 일어나며 모든 경전이 사람이 설함으로 인해 있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 가운데 어리석음이 있고 지혜로움이 있으므로 어리석으면 작은 사람[小人]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 사람[大人]이 되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홀연히 깨달아 그 마음을 열면 곧 지혜로운 사람과 다름이 없다.
선지식이여, 깨치지 못하면 붓다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달을 때 중생이 바로 붓다다. 그러므로 만 가지 법이 모두 자기 마음[自心]가운데 있는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왜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참되고 한결같은 본 성품[眞如本性]을 단박 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菩薩戒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원래 근본 자기 성품이 청정하니 만약 자기 마음을 알아 참성품을 보면[見性]깨달음의 길 모두 이루게 된다[成佛道].'
또『정명경(淨名經)』에서는 말한다.
'지금 바로 환히 깨치면 본래의 머뭄없는 마음을 얻게 된다.'
* 해설 *
이 단에서는『금강반야경』의 교상(敎相)과『금강반야경』을 외어지니는 공덕을 설한다.『금강반야경』의 문자는 바로 무너짐이 없는 실상의 발현이므로『금강경』을 외우며 바르게 관행하면 깊은 법계(法界)에 들어가고 반야삼매(般若三昧)에 들어간다.
반야삼매는 다른 표현으로 하면 정혜(定慧),지관(止觀)이며, 법계(法界)는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며 실상반야이니,『금감경』을 읽고 외우는 문자행은 정혜(定慧),지관(止觀)에 근본이 있고, 정혜와 지관은 바로 실상반야에 근본이 있다.
요즈음 한국불교에서는 경을 읽는 자는 선(禪)이 아니고, 선(禪)을 행하는 자는 경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이분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경전의 가르침과 선(禪)은 결코 배타적이고 상호모순의 관계가 아닌 것이니, 혜능선사는『반야경』의 지송과 반야삼매를 함께 말하고 있으며, 천태선사는『법화경』의 지송과 법화삼매를 동시에 설하고 있다.
십이부의 경전은 중국불교 교판에서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점교(漸敎)와 돈교(頓敎)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을 듣는 사람의 근기와 병통에 따라 세워진 것이다. 곧 여래는 인연법을 실로 있는 것으로 집착하면 공(空)을 설하고, 공(空)을 공(空)으로 집착하면 인연법을 설하므로, 공을 말하고 인연법을 설함이 모두 중도실상을 열어보임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금강경』은 대승의 사람을 위해 설한 법문이고 최상승의 사람을 위해 설한 법문이며, 모습이 모습 없음을 단박 깨닫게 하여 모습과 모습없음에 모두 머뭄 없는 바라밀행을 열어내는 가르침이므로 돈교(頓敎)의 법문이다.
그러므로 모습에서 모습 떠나 안과 밖에 머물지 않고 오고 감이 자유로우면, 그가 바로『금강경』을 듣고 외우되 문자를 빌지 않는 자이지만, 날이 새도록 경을 외우되 경이 말하는 머뭄 없는 지혜의 세계에 돌아가지 않으면, 문자에 막히고 경에 막히고 모습에 막혀 본성의 반야지혜와 상응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