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성BORISUNG

☆해설17/2.대중이 의심하는 바...

보리성2002-04-24 16:09조회 3No. 51
2.대중이 의심하는 바를 낱낱이 답변하시다[大衆所疑一一答辯]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뜻을 물음[問往生西方淨土旨]

   [원문]   자사가 또 물었다.   "제자가 늘 스님들이나 일반대중이 아미타불을 불러 서방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것을 보는데, 그 곳에 가 태어날 수 있는지 화상께서는 말씀해 주시어 의심을 깨뜨려 주십시요."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사군은 잘 들으시오. 혜능이 함께 말하겠소. 세존께서 사위성 가운데 계시면서 서방정토를 말씀하여 중생을 이끌어 교화하셨는데, 경의 글에 분명히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다고 하였소. 만약 모습을 논해 말한다면, 거리가 십만 팔천리 된다는 것은 곧 몸 가운데 열 가지 악[十惡]과 여덟 가지 삿됨[八邪;生滅,斷常,一異,去來]이니 그것으로 멀다고 말한 것이오.   멀다고 말한 것은 낮은 근기를 위함이요, 가깝다고 말한 것은 높은 근기를 위함이니,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지만 법에는 두 가지가 없소. 어리석음과 깨달음에 다름이 있어서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님을 불러[念佛]저 정토에 태어나려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오.   그러므로 부처님은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 부처님의 땅이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소. 사군이여, 동방사람도 다만 그 마음이 깨끗하면 곧 죄가 없고, 비록 서방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또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이오. 동방사람은 죄를 지으면 부처님을 불러 서방에 나기를 구하지만, 서방사람이 죄를 지으면 부처님을 불러 어느 나라에 나기를 바랄 것이오.   어리석은 범부들은 자신의 성품[自性]을 사무쳐 알지 못하고 몸 가운데 정토를 알지 못하여 동쪽을 원하고 서쪽을 원하지만, 깨친 사람은 있는 곳마다 한 가지오. 그러므로 부처님은 '머무는 곳을 따라 늘 편안하고 즐겁다'고 말씀하셨소.   사군이여, 마음 땅이 다만 착하지 않음이 없으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만약 착하지 않은 마음을 품으면 부처님을 불러도 가서 나기 어렵소. 이제 선지식들에게 권하니 먼저 열 가지 악을 없애시오. 그러면 십만을 감이고, 다음 여덟 가지 삿됨을 없애시오. 그러면 팔천을 지난 것이니, 생각 생각 참성품 보아 늘 평등하고 곧은 생활 실천하면 손 가락 한번 튕길 사이에 정토에 이르러 아미타를 뵙게 될 것이오.   사군이여, 다만 열 가지 착함[十善]만 행한다면 어찌 다시 정토에 가서 나기 원할 것이며, 열 가지 악한 마음을 끊지 않는다면 어떤 부처님이 와서 맞아주실 것이오. 만약 남이 없는 법[無生法]을 단박 깨치면[頓悟]서방을 보는 것이 찰나에 있으나, 깨치지 못하면 부처님을 불러 태어나기 원하여도 길이 머니 어떻게 이르겠소.   혜능이 이제 여러 사람에게 서방을 찰나 사이에 옮겨 눈 앞에 곧 보게 할 것이니, 각기 원하오?"   대중이 모두 머리 숙여 절하면서 말하였다.   "만약 이곳에서 본다면 어찌 반드시 태어나기를 원하겠습니까? 화상께서는 자비로 곧 서방을 나타내 널리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대중이여, 세상 사람의 자기 몸은 바로 성(城)이요, 눈. 귀. 코. 혀는 바로 문(門)이오, 밖으로 다섯 문[五門]이 있고 안으로 뜻의 문(門)이 있으니, 마음[心]은 바로 땅[地]이요, 성품[性]은 바로 왕[王]이오. 왕이 마음 땅 위에 사니, 성품이 있으면 왕이 있고 성품이 가면 왕이 없으며, 성품이 있으면 몸과 마음이 있고 성품이 가면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오. 붓다는 성품[性]가운데를 향하여 짓지, 몸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마시오. 자기 성품[自性]이 어리석으면 곧 중생이요 자기 성품[自性]이 깨달으면 곧 붓다니, 자비(慈悲)가 바로 관음이요 희사(喜捨)를 대세지라 하며, 세상을 능히 깨끗이 하면 석가요 평등하고 곧으면 아미타요.   너니 나니 하는 것이 수미산이고 삿된 마음 바다물이며, 번뇌는 물결이고 독으로 해 끼침은 나쁜 용이며, 허망함은 귀신이고 번뇌는 고기와 자라며, 탐내고 성냄은 지옥이고 어리석음은 축생이오.   선지식이여, 늘 열 가지 선을 행하면 천당에 곧 이르고, 너니 나니 하는 다툼 없으면 수미산이 거꾸러지며, 삿된 마음 없으면 바다물이 마르고, 번뇌가 없으면 물결이 사라지며, 독으로 해 끼침이 없으면 고기와 용이 끊어질 것이오.   자신의 마음 땅 위에 깨달음의 여래가 큰 빛을 놓아 밖으로 여섯 문을 비추어 깨끗하면 욕계의 여섯 하늘을 능히 깨뜨리고, 자기 성품이 안으로 비추면 세 가지 독이 없어지며, 지옥 등의 죄가 한 때에 녹아 없어지면 안과 밖이 밝게 사무쳐서[內外明徹]서방과 다르지 않게 될 것이요. 이렇게 수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저 정토에 이를 수 있겠소."   대중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밝게 성품을 사무쳐 보고 대사께 절하고 함께 '거룩하시다'고 찬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널리 원컨대 법계의 중생으로 이 법을 듣는 자들 한 때에 깨쳐 알아지이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이여, 수행하고자 하면 재가(在家)라도 되는 것이니, 꼭 절에 있을 까닭이 없소. 집에 있어 잘 실천할 수 있으면 동방사람의 마음이 착한 것과 같고, 절에 있어도 잘 실천하지 못하면 서방사람의 마음이 악한 것과 같소.다만 그 마음이 깨끗하면 바로 자기 생활 속의 서방정토[自性西方]인 것이오."

 * 해설 *   앞 단에서 모습에 집착한 복덕행을 깨기 위해 방편으로 복덕과 공덕이 다르다 답변한 것처럼, 이 단에서도 혜능선사는 밖으로 부처를 찾고 정토를 내 생활 밖에서 구하는 집착을 깨기 위해 마음만을 깨끗이 할 뿐 정토에 가서 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답변한다.   그러므로 조사의 가르침 가운데 들어 있는 방편의 뜻을 알지 못하면, 정토왕생(淨土往生)의 바른 길을 잃어버릴 것이다.『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보여주고 있는 열여섯 가지 살펴야 할 대상[十六觀境]은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과 세계의 대명사이며 세계의 중도실상이다. 그런데 연기론에서 마음[心]은 세계 밖에 있는 마음만의 마음이 아니라 세계를 안고 있는 마음이며, 세계[法]는 마음 밖에 따로 있는 세계가 아니라 마음인 세계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마음 아닌 마음[心不住心]이고, 세계는 세계 아닌 세계[法不住法]인 것이니, 마음을 깨끗이 하라 할 때도 실로 태어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을 부르고 생각하며[念佛]정토를 살펴 볼 때[觀境]살피는 마음[能觀心]과 살펴지는 대상[所觀心]은 서로 의지해서 부르고 살피는 생각과 마음을 이룬다. 그러므로 살피는 마음도 공하고 살펴지는 대상도 공하되, 살피는 마음이 없지 않고 살펴지는 대상도 없지 않다. 이처럼 마음과 정토, 마음과 부처는 그 모두가 실로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중도실상이니, 마음을 깨칠 때 곧 세계의 있되 있지 않은 실상을 깨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혜능선사가 남이 없는 법을 단박 깨치면 서방을 보는 것이 찰나에 있다 함은 세계를 버리고 새롭게 주관적인 마음에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토, 마음과 부처의 중도실상을 바로 깨쳐 주체적으로는 알되 앎이 없는 참된 앎에 돌아가고, 객관적으로는 나되 남이 없고 남이 없되 남 없음도 없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 마음 깨침[頓悟自心]과 정토에 가서 남[往生淨土]은 결코 배타적인 뜻이 아니다. 『서방합론(西方合論)』은 이러한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노선사는 말한다.   "남[生]으로써 남을 삼으면 상견(常見)에 의해 바른 뜻을 잃고, 남이 없음[無生]으로써 남이 없음을 삼으면 단견(斷見)에 의해 미혹함이 되니, 나되 남이 없고 남이 없되 나는 것이 제일의제이다."   영명선사는 말한다.   "모습[相]에 즉한 성품[性]이므로 작용이 체를 떠나지 않고, 성품[性]에 즉한 모습[相]이므로 체가 작용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성품을 찬탄하면 곧 모습을 찬탄함이고, 만약 모습을 허물면 바로 성품을 허무는 것이다."   천여선사는 말한다.   "성품이 능히 모습을 내므로 남이 없이 나고, 모습이 성품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니 남이 곧 남이 없다. 이것이 곧 소리 없는 소리 가운데 바람이 가지를 흔들고 물이 솟구치는 소리이며, 빛깔 아닌 빛깔 속에 있는 보배나무와 난간이니, 어찌 재가 날고 연기가 사라지듯 아무 것도 없는 캄캄한 공[頑空]과 같을 것이며, 인과를 없애버리는 마구니의 권속과 함께 함이겠는가."
  앞에 인용한 여러 조사들의 법문에서 보이듯 성품은 모습이 모습 아님을 표현하는 가명이므로, 모습을 말하면 성품인 모습이며 성품을 말하면 모습인 성품이다.   혜능선사가 몸을 성(城)이라 하고 성품을 왕(王)이라고 비유한 것은 연기론의 기본 입장에서 보면 결코 옳은 언어용법은 아니다. 이러한 표현은 자칫 색심이원론(色心二元論)으로 오해될 소지를 안고 있는 표현이니, 남양혜충선사가『단경』편집에 나타나고 있는 외도견을 비판하고 있듯이, 이 표현은 모습에 대한 집착을 깨기 위해 조사가 짐짓 방편으로 세운 가르침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연기론의 기본입장에서는 마음을 들면 세계이고, 세계를 들면 마음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로 깨닫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며, 세계의 실상을 바르게 살피는 것이 바로 마음을 바로 깨닫는 것이니, 이렇게 안과 밖, 마음과 세계가 있되 있지 않고 없되 없지 않을 줄 통달함이 바로 내외명철(內外明徹)이다.   마음과 부처, 마음과 정토의 참모습 살피는 바른 관을『서방합론(西方合論)』은 사명지례(四明知禮)의『묘종초(妙宗초)』와 온릉선사(溫陵禪師)의 가르침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묘종초』에 말한다. '성품 가운데 세 가지 덕의 바탕이 바로 모든 붓다의 세 가지 몸이고, 살펴지는 바 모든 붓다의 세 가지 덕[三德], 세 가지 몸[三身]은 바로 나의 한 마음에 갖춰 있는 세 가지 살핌[一心三觀]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살피는 마음 밖에 살펴지는 부처가 따로 있고 정토의 경계가 마음 그대로가 아닐 것이니, 어떻게 원종(圓宗)의 상대가 끊어진 관(觀)이라고 이름하겠는가.   또한 아미타불의 세 가지 몸으로 법신(法身)을 삼으면, 나의 세 가지 관[三觀]은 반야(般若)가 되며, 관(觀)이 이루어져 붓다를 보면 곧 해탈(解脫)이다.   법신ㆍ 반야ㆍ 해탈 가운데 하나를 들면 셋을 갖춤이 마치 이(伊:∵)자의 세 점과 같다.   붓다를 살피는 것이 이미 그렇다면 모든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를 살피는 것도 이치가 다른 길이 아니다.   넓혀 보임은『소초』와 같으니 여기서 갖춰 말할 수는 없다.   온릉선사(溫陵禪師)에 이르르면 순전히 염불의 한 소리로써 삼관의 문에 들어간다.   '생각이 삼관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한 소리로 염불하면서 이 능히 생각하는 체가 공하고 생각되어지는 부처님이 모습 없음을 요달하면 곧 생각은 공관에 있고, 생각되어지는 붓다의 몸은 곧 응신(應身:있되 있음 아닌 몸)이니, 마음은 견사혹(見思惑:있음에 물든 미혹)을 깨뜨린다.   비록 능히 생각하는 체가 공하고 생각되어지는 바 모습이 없지만, 능히 생각함이 분명하고 생각되어지는 바가 밝게 드러남을 방해하지 않으면 곧 생각은 가관(假觀)에 있고, 생각되어지는 붓다의 몸은 곧 보신(報身:있되 있음 아닌 몸)이니, 마음은 견사혹(見思惑: 있음에 물든 미혹)을 깨뜨린다.   바로 능히 생각함과 생각되어지는 바가 공할 때에 곧 능히 생각함과 생각되어지는 바가 밝게 드러나며, 능히 생각함과 생각되어지는 바가 밝게 드러날 때 능히 생각함과 생각되어지는 바가 고요하면 공관과 가관이 서로 함께 있어 생각은 중도관에 있고, 생각되어지는 붓다의 몸은 법신(法身: 있음과 없음을 뛰어넘은 중도의 몸)이니 마음은 무명혹(無明惑: 중도를 보지 못한 근원적 미혹)을 깨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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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성의 집 · borisung.com · 2001년 원본의 메뉴·게시판·사진을 그대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