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성BORISUNG

☆해설20/제4장 선정과 지혜의 ...

보리성2002-06-14 16:42조회 4No. 54
제4장 선정과 지혜의 하나됨[定慧品] 1. 선정과 지혜가 하나인 일행삼매[定慧一體一行三昧] 선정과 지혜가 한 몸임을 열어보이다[開示大衆定慧一體]
  [원문]   대사께서 대중에게 이렇게 가르쳐 보이셨다.   "선지식이여, 나의 이 법문은 선정과 지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대중은 잘못 헤매어 선정과 지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선정과 지혜는 한 몸이요 둘이 아니니, 선정은 지혜의 바탕[體]이요, 지혜는 선정의 쓰임[用]이다. 곧 지혜일 때 선정이 지혜에 있고, 곧 선정일 때 지혜가 선정에 있으니, 이 뜻을 알면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배움이다.   모든 도 배우는 사람들은 선정을 먼저 해서 지혜를 낸다거나 지혜를 먼저 해서 선정을 낸다 하여 선정과 지혜가 각기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견해를 짓는 자는 법에 두 모습이 있어서 입으로는 옳은 말을 하나 마음 가운데는 옳지 못한 뜻이 있으니, 헛되게 선정과 지혜가 있어서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지 못하다.   만약 마음과 입이 모두 옳아서 안과 밖이 한 가지가 되면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게 된다. 스스로 깨달아 수행함은 말다툼에 있지 않으니, 만약 앞과 뒤를 다투면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그렇게 되면 이기고 지는 마음을 끊지 못하여 도리어 나와 법[我法]을 키워가게 되니, 네 가지 모습[四相: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을 떠나지 못한다.   선지식이여, 선정과 지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과 같고 빛과 같다. 등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곧 어두워지니, 등은 빛의 바탕이고 빛은 등의 쓰임이다. 등과 빛이 이름은 비록 둘이 있으나 근본은 하나이니, 이 선정과 지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다." * 해설 *   불교의 실천은 존재의 실상을 주체화하는 길이자 존재의 실상 그대로의 삶이다. 그러므로 모습이 모습아니되 모습 아님이 모습 아님도 아닌 존재의 실상 밖에 선정과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삿된 선정[邪定]일 것이며 미친 지혜[狂慧]일 것이다. 바른 선정은 모습이 모습 아닌 진제(眞諦)의 주체화지만, 그 모습 없음은 모습을 떠나지 않으므로 선정은 지혜인 선정이며, 바른 지혜는 모습 아님이 모습 아님도 아닌 속제(俗諦)의 주체화지만, 그 모습 살려내는 일은 모습 없음을 떠나지 않으므로 지혜는 선정인 지혜이다.   정혜(定慧)는 경전과 어록에 따라 지관(止觀), 적조(寂照), 성적(惺寂)이라 달리 표현된다. 그리고 수행해가는 지위[因位,途中事]에서 정혜라고 쓰이는 말이 여래의 지위를 잡아 설명할 때는 보리(菩提:bodhi.慧), 니르바나(涅槃:nirvana, 定)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실천 과정을 중심으로 '선정과 지혜를 같이 닦음[定慧雙修]','밝음과 고요함을 평등하게 지님[惺寂等持]','그침과 살핌을 함께 행함[止觀俱行]'이라 한 말과 과위(果位)를 잡아 '늘 고요하고 밝은 빛[常寂光]'이라 하거나 보리열반(菩提涅槃)이라 한 말을 둘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지금 한국불교의 선가에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하면 점수적인 교가의 수행이며, 조사가풍은 불교 밖에 따로 있다고 하는 치우친 견해들이 난무한다. 물론 여러 종(宗)이 내세우는 수행과정에서 강조점을 보면, 묵조선(默照禪)은 선정을 먼저 하고 지혜를 뒤로 하며[先定後慧],간화선(看話禪)은 지혜를 먼저 하고 선정을 뒤로 하는[先慧後定]차별성을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묵조든 간화든 그 수행법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며, 가리사(家裏事)를 떠나지 않는 도중의 일[途中事]이 되려면 모두 지관구행, 정혜일체의 중도행에 귀착해야 한다.   혜능선사가 선정은 지혜의 바탕이며 지혜는 선정의 쓰임이라고 표현함은, 바로 모든 모습은 실로 있음 아니되 허무의 공(空)도 아닌 존재의 실상을 실천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인식 주체[根],인식 대상[境],인식 행위[識]그 자체가 연기이므로 실로 일어남이 없음을 사무쳐보아 온갖 것에 머뭄 없음이 바로 선정의 모습이라면, 인식 주체, 인식 대상, 인식 행위가 공하기 때문에 연기됨을 통달하여 허무에 떨어짐이 없이 인연의 모습 여실히 비추어 내고 여실히 발휘해 쓰는 것은 지혜의 모습이다.   곧 만법이 연기이므로 공이고 공하기 때문에 연기하므로 선정은 늘 지혜인 선정이어야 하며, 지혜는 늘 선정인 지혜이어야 하니, 이 뜻을『마하지관』은 이렇게 말한다.
존재의 참모습이 늘 고요한 것이 곧 지(止)의 뜻이요, 고요하되 늘 비춤이 관(觀)의 뜻이다.   혜능선사가 선정과 지혜가 한 몸[定慧一體]이라고 한 뜻과 위 천태『마하지관』에서 지관의 정의는, 정혜와 지관을 모두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방편만으로 보는 것을 부정하고, 방편이자 실상 그대로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천태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방편과 실상이 곧 방편이 아니고 실상이 아니어서 둘이 없고 다름이 없으며, 합하는 것도 아니고 흩어짐도 아니다.   방편도 아니고 실상도 아니어서 참성품이 늘 고요함을 지(止)라 하고, 고요하되 늘 비추어 방편이 되고 실상이 됨을 이름하여 관(觀)이라 한다. 관(觀)이므로 지혜[智]라 하고 반야(般若)라 하며, 지(止)이므로 눈(眼)이라 하고 수능엄삼매(首능嚴三昧)라 한다. 이와 같은 이름들은 둘이 아니고 다르지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니, 이것이 곧 이루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지관[不思議止觀]이다.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편과 깨달음 자체를 둘 아님으로 규정하는 천태선사의 가르침을 다시 풀이하면, 지관(止觀)과 정혜(定慧)란 도중사(途中事)를 나타내는 이름이자 가리사(家裏事)의 이름인 것이다. 또 인연으로 일어나는 모든 있음은 공한 있음이고, 공함은 있음 그 자체의 공함이므로 지(止)의 고요함은 늘 살핌 그대로의 고요함이며, 관(觀)의 밝음은 늘 고요함 그대로의 밝음이므로 천태선사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오음, 십이입이 모두 진여라 버려야 할 고제가 없고, 무명의 번뇌가 바로 보리라 끊어야 할 집제가 없으며, 치우침과 삿됨이 바로 중도라 닦아야 할 도제가 없으며, 생사가 곧 열반이라 얻어야 할 멸제가 없다.   고제와 집제가 실체 없으므로 세간이 없고, 도제와 멸제가 실체 없으므로 출세간이 없어서 순전히 하나인 실상이라 실상 밖에 다른 법이 없다.   법성이 고요함을 지(止)라 이름하고, 고요하되 늘 비춤을 관(觀)이라 이름한다. 비록 처음과 나중을 말하나 둘이 없고 다름이 없으니, 이를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 한다.
  혜능선사가 선정일 때 지혜가 있고, 지혜일 때 선정이 있다 한 법문을 『마하지관』은 비추되 늘 고요함이 지(止)이고, 고요하되 늘 비춤이 관(觀)이라고 표현한다.   천태선사에 의하면 법성의 고요함이 지(止)이므로 지(止)일 때 인식 주체[能]와 인식 대상[所]이 모두 공하고, 법성의 고요하되 비춤이 관(觀)이므로 관(觀)일 때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이 실로 없지 않다. 곧 주ㆍ객의 실체성이 모두 부정된 곳[能所雙遮]이 지(止)라면, 주ㆍ객의 연기적 실상이 모두 긍정된 곳[能所雙照]이 관(觀)이며, 부정 긍정이 동시에 함께 하여 부정하되 살리고 살리되 부정하는 곳[遮照同時]이 지관을 구행[止觀俱行]하는 보리열반인 것이다. 이 뜻을 영가선사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사마타(samatha:止,定)이므로 비록 고요하나 늘 비추고, 비파사나(vipasuana:觀,慧)이므로 비록 비추나 늘 고요하며, 우페크샤(upeksa:捨,等)이므로 비춤도 아니고 고요함도 아니다. 비추되 늘 고요하므로 속제를 말하되 곧 진제요, 고요하되 늘 비추므로 진제를 말하되 곧 속제이며, 고요함도 아니고 비춤도 아니므로 유마힐은 베살리에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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