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대사께서 대중에게 가르쳐 보이셨다.
"선지식이여, 본래 바른 가르침에는 단박 깨침과 점차로 닦아감[頓漸]이 없지만, 사람의 근기에 스스로 날카롭고 무딤이 있어 어리석은 사람은 점차로 닦아가고[漸修],깨달은 사람은 단박 계합한다[頓契].
스스로 머뭄 없는 본마음[本心]을 알고 스스로 모습없는 본성품[本性]을 보면 곧 차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단박 계합함과 점차로 닦아감의 거짓 이름을 세운 것이다.
* 해설 *
이 단에서 혜능선사는 점차 닦음과 단박 계합함이 사람에 따라 세워진 거짓 이름[假名]이니,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면 점차로 닦음이나 단박 계합함에 아무 차별이 없다 말한다.
위 말씀을 네 가지 실단(siddhanta)으로 보면 실상 그대로의 바른 가르침[正敎]자체가 제일의실단(第一義悉壇)이라면, 사람의 근기나 병통에 따라 세워진 교설은 위인실단(爲人悉壇)이며 대치실단(對治悉壇)이다. 실단은 성취 완성의 뜻인데 실상에서 일어난 방편이 중생을 실상의 세계로 이끌어 성취시켜줌을 뜻한다. 실상 그대로인 제일의실단에서 보면 닦음[修]과 깨침[悟]의 분별도 붙을 수 없고, 점차적인 닦음과 단박 닦음의 이름도 세울 수 없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에 따르는 위인실단, 병통에 따라 그 병통을 치유하기 위해 가르침의 차별된 모습을 세우는 대치실단, 세간의 여러가지 풍조와 욕락에 맞추어 세워지는 세계실단에서는 단박 깨침과 점차 계합함, 닦음과 깨침의 갖가지 이름이 세워진다.
닦음[修]은 사제법에서 보면 도제(道諦)에 상응하는 언어이며, 깨침[悟]은 멸제(滅諦)에 상응하는 언어이다. 그리고 닦음이 고통의 현실을 해탈로 전환시켜내는 실천의 인과가 없지 않음을 나타낸다면, 깨침으로 표현된 멸제에는 그러한 실천의 인과마저 공한 것이다. 그런데 도제가 없는 멸제가 없으므로 닦음을 떠난 깨침의 신비화도 옳지 못하고, 멸제가 되지 못한 도제란 부질 없는 헛수고일 뿐이므로 깨침을 떠난 닦음의 고정화도 옳지 못하다. 그렇다면 닦음이 닦음 아닌 닦음으로 전환되는 곳을 깨침이라 이름하며, 깨침이 깨침아닌 깨침으로 드러날 때 닦음은 깨침의 자기표현이 된다 할 것이다.
'점차'와 '단박'이라는 언어에서도, 낡은 것을 새롭게 하고 번뇌를 돌이켜 지혜를 드러내는 실천의 인과가 없지 않은 삶의 측면을 기술하는 표현이 '점차 닦음'이라는 언어라면, 인과가 공한 삶의 본래적인 청정성을 반영한 언어 표현이 '단박 깨침'이다. 그러므로 인과가 실로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중도실상에서는 점차 닦음과 단박 깨침의 모습이 모두 얻을 것이 없지만, 공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점진적 인과를 말하고, 인과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인과가 공한 본래 청정성에 단박 깨쳐 들어가도록 가르친다.
곧 제일의실단(第一義悉壇: 닦음이 온통 깨침이 되고,깨침이 온통 닦음으로 발현되는 본분 그 자체)에서는 닦아서 얻는다 해도 맞지 않고 닦을 것이 없다 해도 맞지 않지만, 중생의 병통에 따라 법을 여는 대치실단과 세계실단에서는 번뇌에 빠진 범부들에게는 점차로 닦아가라[漸修]가르치고, 번뇌가 본래 남이 없는 줄 모르고 억지로 번뇌를 끊고 닦아서 얻으려는 수행자에게는 본래 청정함을 단박 깨치라[頓悟]가르친다. 다시 본래 청정을 신비화하거나 공에 빠져 그것으로 깨달음을 삼는 자에게 본래 청정을 단박 깨치되 닦음과 인과를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단박 깨쳐 점차 닦는다[頓悟漸修]고 말하며, 단박 깨쳐 점차 닦는다는 말을 듣고 한 번 깨친 뒤 점차 닦아 얻을 깨달음이 따로 있는 줄 아는 이에게는, 번뇌가 남이 없는 곳에 깨달음 자체가 닦음 없는 닦음으로 발현됨을 보이기 위해 단박 깨침이 바로 단박 닦음[頓悟頓修]이라 가르친다.
위와 같은 닦음과 깨침의 해석은 바로 사람의 병통을 치유하기 위해 설정된 대치실단의 관점에서 단박 깨침과 점차 닦음을 풀이한 것이다.
이에 비해 지금『단경』에 나타난 '닦음'과' 깨침', '단박'과 '점차'의 언어사용법이나 규봉종밀선사 등이 쓰고 있는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개념은 사람의 근기에 맞추어 깨달음의 방편을 세워주는 위인실단의 관점에서 쓰여지고 있다.
근기에 따르는 위인실단의 차원에서 세워진 범주 설정과 법에 대한 집착을 깨기 위한 대치실단의 관점에서 쓰여지는 언어용법이 서로 혼동됨으로 해서 수행론에 있어서 돈점의 논쟁은 서로 융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가고 있다.
한국불교에서 끊임없은 논쟁거리를 일으키고 있는 성철화상의 하택, 규봉, 보조 비판 또한 불교 범주 속에 들어 있는 여러가지 인연을 살피지 않고, 언어 그 자체를 형식논리만으로 고정시킨 채 고인의 사상을 재단함으로써 전통의 발전적 계승에 서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겨주고 있다.
먼저 규봉종밀(圭峯宗密)의 점수. 돈수라는 개념 사용을 살펴보자.
돈오돈수란 아주 뛰어난 지혜 가진 이를 말함이니, 근기와 욕락이 모두 빼어나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치고, 크나큰 총지를 얻어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과 뒤가 바로 끊어진다.
이 사람의 세 가지 업은 오직 스스로 밝아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다. 장애를 끊는 것은 마치 한 타래 실을 자름에 만가닥이 단박 끊어짐과 같고, 덕을 닦음은 한 타래 실을 물들임에 만가닥이 단박 물들여짐과 같다.
하택선사가 '한 생각이 본성과 상응하면 팔만 바라밀행을 한 때에 모두 쓴다'고 하였으니, 현실의 자취에 나아가 말한다면 저 우두법융(牛頭法融)선사의 무리와 같다.
규봉종밀은 돈오점수, 돈오돈수를 위인실단으로 해석하여 돈오돈수를 가장 높은 근기의 사람이 '한 번 깨쳐 만 가지 덕을 모두 갖춤'이라고 풀이하며, 그 뜻을 하택선사(荷澤禪師)가 '한 생각이 본성으로 상응하면 팔만바라밀행을 한 때에 모두 쓴다'고 한 뜻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하택의 위 법문은 대치실단을 통해 제일의실단을 바로 밝힌것으로 보아야 한다. 곧 하택이 말한 '한 생각이 본성으로 상응함'이 『단경』에서 말하고 있는 견성(見性)이라면, 팔만바라밀행을 한 때에 씀은 바로 성불(成佛)이며 묘용(妙用)이다. 본성은 모습 너머의 절대 실재가 아니고, 생각이 생각 아니고 모습이 모습 아님을 본성이라 하므로, 본성은 바로 생각 아닌 참생각으로 발휘되고 모습 아닌 참모습으로 실현되니, 생각이되 생각 아니며 생각 아니되 생각 아님도 아닌 머뭄 없는 생활이 바로 바라밀행이며 보현행원이며 닫혀짐 없는 사회적 실천이다.
하택은 성품에 대한 집착을 깨기 위해 바라밀행을 말하고, 바라밀행이 머뭄 없는 행임을 보이기 위해 본성을 말하니, 하택의 위 법문은 근기의 높낮이와 관계 없는 법문이다.
규봉선사는 돈오돈수를 근기론으로 해석하여 그 뜻을 하택의 위 법문과 같이 취급하나, 앞에서 밝힌 바처럼 본성의 깨침이 곧 바라밀행이 된다는 하택의 법문은 근기론과 무관하다.
근기론과 위인실단으로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를 해석하면, 어떤 이는 단박 이치적으로 남이 없는 법[無生法]을 깨치되 이해의 자취에 머뭄 없이 쉬임없는 정진으로 남이 없음을 채달해가며, 어떤 이는 점진적인 선정을 통해 나중 남이 없는 법을 단박 통달하며, 어떤 이는 단박 남이 없는 법을 깨칠 때 머뭄 없는 행을 함께 갖춘다. 그러므로 근기론으로 볼 때는 사람 따라 점수돈오(漸修頓悟),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가 모두 그에 맞는 실천의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실로 생각이 생각 아니고 모습이 모습 아닌 진제를 깨달을 때에는 점수돈오의 자취도 없고 돈오돈수의 자취도 없는 것이니, 그 뜻을 혜능선사는 '근기에 따라 차츰 닦는 이가 있고 단박 깨치는 이가 있지만, 스스로 본성을 깨치면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지금 한국불교의 돈점논쟁은 교설 속에 있는 네 가지 실단의 뜻에 착안하지 못한 채, 형식논리만으로 서로를 비판함으로써 실제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소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앞에서 이미 풀이해 보인 바처럼 단박 깨침과 점차 닦음을 대치실단의 관점으로 보면, 점차 닦아 깨침[漸修頓悟]은 생멸사제문(生滅四諦門)이고, 단박 깨침[頓悟]은 무생사제문(無生四諦門)이며, 단박 깨쳐 점차 닦음[頓悟漸修]은 무량사제문(無量四諦門)이고, 단박 깨쳐 단박 닦음[頓悟頓修]은 무작사제문(無作四諦門)이 되는 것이니, 네가지 문은 집착에 따라 다른 문이 세워졌을 뿐 생멸사제를 없애고 무생사제가 아니며, 돈오점수문을 없애고 따로 돈오돈수문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해 돈오점수의 뜻을 위인실단으로 풀이하면 점수돈오, 돈오점수, 돈오돈수가 수행하는 사람의 근기와 성향에 따라 각기 그에 맞는 실천의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